정교회 신앙/오늘의 축일

[4월 13일] 성 마르티노 로마의 주교 고백자

monastery 2025. 12. 10. 01:10

 

성 마르티노 로마의 주교 고백자(4월 13일)

 

진리의 파수꾼

정교성(Orthodoxy)의 초석이 된 성인은 콘스탄스 2세 포고나토스(641-68) 황제의 재위시절에 살았다. 649년 성인이 주교직에 오른 뒤 겨우 석 달 뒤, 105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한 공의회가 열렸고, 이 공의회에서는 이른바 ‘단의론’(單意論, Monothelitism: 이른바 ‘단성론’[單性論] 이단의 새로운 형태로서 그리스도께서 두 가지 본성[신성과 인성]을 가지셨지만 한 인격이시므로 그분의 의지[will] 또한 하나일 뿐이라는 주장. 680년의 제6차 세계공의회는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느님이시면서 참 사람이시므로 그분은 신적인 의지뿐 아니라 인간적인 의지도 가지셔야만 한다고 공표함으로써 이 이단을 정죄하였다.) 이단과 황제가 정치적 기회주의를 통해 진리와 오류를 뒤섞은 채 발행한 문서(Typos)를 단죄하였다. 이 당시 테오도로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어 있던 성인은 황제와 그를 지지하는 신학자들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곧,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의 의지(곧, 신적인 의지)만이 존재한다고 선포함으로써 정도(正道)를 벗어난 채 동방의 단성론자들을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고난의 여정

공의회가 열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황제는 자신의 대리인을 이탈리아로 보내 성인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로마에 도착하여 교황에게 간 황제의 대리인은 공의회에 관하여 조사하였다. 성인은 자신이 거룩한 교부들의 신앙에서 조금 벗어났다고 비난하는 이들에 대응하면서 그들을 파문하였다. 그러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을 두려워한 황제의 대리인은 짐짓 거짓으로 꾸미면서 성인의 신앙에 문제가 없다고 답하였다. 

그리고 사흘 뒤인 월요일 아침, 황제의 대리인은 무기를 찾는다는 구실을 앞세워 성당 안으로 쳐들어갔고, 함께 한 군인들은 성물(聖物)들을 집어던지면서 관절염으로 고생하던 성인을 붙잡았다. 653년 6월 19일 화요일에 황제의 대리인과 군인들은 사로잡은 성인을 배에 태운채 콘스탄티노플로 떠났다. 석 달이나 걸린 길고 힘겨운 항해기간 동안 병으로 고생하던 성인은 모든 권리를 빼앗긴 채 씻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항구에 닿자 군인들은 병든 성인을 배에서 끌어내렸고, 성인의 몸에 온통 상처를 입혔다. 그리고는 신도들이 성인에게 가져온 식량을 몽땅 빼앗아 버렸다.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

마침내 9월 17일 콘스탄티노플에 다다르자 초라한 침상에 누운 성인은 사람들의 온갖 욕설을 들어야 했고, 나중에는 감옥에 갇힌 채 아무도 모르게 93일 동안 지내야 했다. 12월 20일, 전차 경주장에서 형식뿐인 재판을 받은 성인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성인의 제의(祭衣)를 찢어버리고 나서 성인의 목에 무거운 쇠사슬을 채운 다음 시내 곳곳으로 끌고 다녔다. 병들고 영양이 부족한 노인인 성인은 거의 걷기조차 힘들었으나 다만 얼굴에서만은 빛이 났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진리를 위한 고난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감옥으로 돌아온 성인은 사형자들이 머무는 방에 갇혔다.

다음날, 병약한 바울로 2세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641-53)는 성인에 대한 사형선고를 추방(유배, exile)으로 감형하는 허락을 얻어냈다. 그러나 바울로 총대주교가 죽고 피루스(Pyrrhus) 총대주교가 승계한 뒤로도 성인은 85일 동안이나 더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고, 그 뒤 아무도 모르게 크리미아(Crimea)의 한 지역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지독한 배고픔과 학대를 견뎌야 했던 성인은 656년 9월 16일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 손에 맡긴 채 안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