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막심 그리스인 수도자 (축일 1월 21일)
오토만 제국 시대
본래 이름이 미하일 티볼리스였던 성인은 비잔티움 제국이 오토만 터키에게 멸망한 직후인 1470년경 아르따(Arta)에서 태어나셨다. 성인의 집안은 일찍이 총대주교를 배출한 훌륭한 가문이었는데, 성인은 젊은 나이에 이탈리아로 가서 당대의 최고 지성들에 견줄만한 학문을 쌓았다. 그 후 1507년경 그리스로 돌아오는 길에 성인은 아토스산의 바토페디(Vatopedi) 수도원으로 들어가 막시모스(Maximus)라는 이름을 가진 수도자가 되었다. 겸손하면서도 생각이 깊었던 성인은 10년 동안 학문연구와 기도생활을 계속하였다. 1516년 러시아의 대공(大公) 미하일 이바노비치가 요청해옴에 따라 시편과 여러 정교회서적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하기 위해 성인은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성인은 그리스어 성경과 예식서들의 슬라브어 번역본에 있는 많은 오류들을 바로 잡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이로써 타타르족의 침입 이후 이른바 ‘영적인 굶주림’ 속에 놓여있던 러시아인들로부터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러시아의 감옥에서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성과는 성인을 시기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모함할 빌미를 찾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525년 결과적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교회법정에 서게 된 성인은 이단으로 단죄된다. 이 재판 결과에 따라 성인은 볼로콜람스크의 수도원으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배고픔과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다. 모든 소지품을 빼앗긴 성인은 성체성혈을 받는 것과 책을 읽을 자유마저 거부당한채 오로지 기도에만 의지하면서 자신을 지탱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천사가 성인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인내하여라! 이곳에서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너는 영원한 형벌에서 해방될 것이다.’ 이같은 하느님의 위로를 받은 성인은 감사하는 마음을 억누를 길 없어 종이 한 장 없는 자신의 방에서 석탄 조각을 분필 대신 집어 들고 방 벽에 성령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성가를 써내려갔다. 지금도 러시아와 세르비아의 수도원들에서 성령강림절(오순절) 뒤 첫 월요일에 이 성가를 부른다.
의로운 성인의 고난과 영광
그 뒤 육년이 지난 1531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의 교회법적인 지위와 관련된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다시 재판을 받게 된 성인은 종신형을 언도받고 트베르에 있는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지역 주교의 도움으로 감옥에서나마 신학적 저술활동과 서신교환등을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이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1551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팔십 일세로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때가 되어서야 성인은 여러 경건한 귀족들과 성 세르기우스-성삼위 수도원 수도원장 등의 탄원에 힘입어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예우를 갖춘 채 모스크바로 모셔진 성인은 그곳의 수도원에 들어가 안식을 맞을 때까지 신학적 문필작업을 계속하였다. 그 다음해(1552년) 러시아 황제 이반 4세는 러시아교회에 스며든 개신교 캘빈파의 이단사상을 논박하기 위해 공의회를 열기로 하고 막심 성인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너무 노쇠하여 여행을 할 수 없었던 성인은 공의회에 직접 참석하는 대신에 이단에 대한 훌륭한 반박문을 써서 보내 주었다. 바로 이 반박문이 정교 신앙의 위대한 증거자였던 성인의 마지막 작품이다. 성인은 1556년 1월 21일 팔십 육세의 나이로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안식한 뒤 오래지 않아 성인은 ‘러시아교회에 빛을 밝힌’ 성인으로서 존경을 받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