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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니라.” (1)

monastery 2023. 7. 12. 01:10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니라.” (1)

소티리오스 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성인은 구복단을 “황금의 줄(chain)”이라고 부릅니다. 황금 줄의 첫 번째 고리, 즉 겸손한 이들에 대한 축복이 고귀하듯이, 두 번째 고리, 곧 슬퍼하는 이들에 대한 축복도 고귀합니다. 그러나, 구복단을 처음 읽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정말이지, ‘슬픔’이라는 단어와 ‘슬퍼하는 사람’이라는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에게 슬픈 기억과 표현이 떠올라서 우울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쁨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복단 내용의 본질을 연구해 보면, 구복단 역시도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이, 과시와 교만 속에서 영광을 추구하는 왜곡된 정신을 갖게 되면, 이 죄악된 세상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이 일종의 정신적, 도덕적 마취로 마음을 어둡게 한 후에는 인간을 소위 ‘세속적 기쁨’으로 이끌어 행복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게 하는데, 그 욕구의 핵심은 바로 기쁨입니다. 웃고, 장난치고, 모욕하고, 방탕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기쁨의 영역을 축소시켜 버리는 이러한 삶의 방식에서 사람은 쾌락의 빈틈을 채우기 위해 고전적인 오락 방식과 현대적인 오락 방식을 계속 새롭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락과 놀이는 대부분 범죄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구하기 점점 더 어려운 것이 되는 이 ‘세상적 기쁨’에는 분명 걱정, 눈물, 탄식, 고통, 그리고 위로받을 수 없는 슬픔이라는 부정적이고 비참한 측면들이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들과 마약 중독자들이 알코올이나 마약과 같은 독한 물질을 몸에 받아들여서 즐거운 기분을 유지하고 꿈꾸는 상태에 있고 싶은 것처럼, 세속적인 사람들도 오락과, 죄악시되는 쾌락을 통해, 슬픈 생각과 걱정에서 벗어나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려고 합니다. 이 모든 사람들의 마지막 운명은 독소로 인해 몸의 장기들이 손상되는 것, 방탕한 삶에서 얻은 전염병으로 건강을 잃는 것, 그리고 슬픔과 괴로움입니다. 

 

마약 중독자가 구원을 얻으려면 마약을 끊는 것 외에 다른 치료법이 없습니다. 마약 복용을 중단하면, 물론 처음에는 일시적인 고통을 느끼겠지만, 결국에는 그토록 바라던 건강을 회복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해롭고 독이 되는 죄악된 쾌락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 모든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회개하며 하느님께로 돌아가려는 용감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회개를 하면, 그 열매로서 진정한 기쁨인 ‘위로’를 얻게 됩니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잘못된 길에서 돌아와 회개를 하면 처음에는 근심을 느낄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위로와 진정한 기쁨이 마음속에 자리하게 됩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사람은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나쁜 길이었는지 깨닫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삶으로 얼마나 하느님을 걱정스럽고 화나게 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에서 동떨어진 죄악된 삶으로 육신과 영혼을 더럽히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 그에게 근심과,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근심과, 영적인 근심과,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애통함’을 초래합니다.

 

주님은 세상의 죄악된 쾌락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애통함’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축복하십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통해서 보면,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애통함’은 사람이 하느님을 떠나서 생기는 세상적인 애통함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썼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겪는 상심은 회개할 마음을 일으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을 후회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속적인 상심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2 고린토 7,10)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애통함’과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겪는 상심’이 무엇인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구복단의 두 번째 부분을 첫 번째 부분과 연결해 보면 이것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첫 번째 부분을 통해서, 영적으로 가난함을 느끼는 사람들과 죄가 영혼에 낳은 깊은 병을 느끼는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죄에 대한 이러한 의식과 자각은 영혼에 슬픔과 고통을 가져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슬픔을, 즉 회개하는 죄인이 느껴서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이 슬픔을 축복하셨습니다.(2 고린토 7,10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지상에서 흘리는 눈물 가운데 가장 따뜻하고 성스러운 것은 회개의 눈물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고통 가운데 사람의 영혼 깊은 곳에 들어가는 가장 거룩한 고통은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만 죄를 얻은 몸, 당신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한 이 몸”(시편 51,4)이라는 다윗 왕의 고백입니다. 지상에서 겪는 모든 슬픔 가운데 가장 공손한 것은 “내 죄 내가 알고 있사오며 내 잘못 항상 눈앞에 아른거립니다.”(시편 51,3)라는 말이 표현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의 고통과 슬픔은 영혼을 쇠약하게 만들고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생명을 주며 영혼을 평화롭고 기쁘게 해 준다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 거룩한 교부들이 말하듯, ‘기쁨 어린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으로, 우리 죄에 대해서는 슬퍼하지만 이 죄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니라.”라는 주님의 구복단의 두 번째 말씀이 우리에게도 해당되도록, 우리 모두 이 ‘기쁨 어린 슬픔’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