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사바스 깔림노스의 사제(4월 7일)
성인의 어린 시절
성인은 1862년 동부 스라키(Thrace) 지역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인들의 삶에 대해 잘 들어 알고 있던 성인이 수도자가 될 생각을 하고 있은 반면, 부모는 초급학교를 마치는 대로 작은 가게를 그에게 맡기려 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열두세 살 무렵?)에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집을 떠나온 성인은 곧 아토스산의 성 안나 스키티(Skete: 수도원과 비슷하나 수도자들이 주로 농사짓는 일이나 손으로 성물을 만드는 일등에 열중하며 수도생활을 하는 곳)에 도착하여 예비 수도자가 되었다.
수도자가 된 성인
그리고 십이 년이 흐른 뒤인 1887년에 성인은 성지(聖地)들을 순례하며 경배하였고, 이어 그곳의 한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다.(1890년) 다시 성 안나 스키티로 돌아와 두 번째 기간을 보내게 된 성인은 성화작가로서 열심히 수련하였고, 그 뒤 사제로 서품 되었으며 일 년 동안 예루살렘 총대주교청에 속한 학교의 일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성인은 1907년 무렵에 자신이 수도서원을 한 수도원 가까운 곳의 한 작은 동굴에 거할 수 있게 되어, 그곳에서 오로지 기도와 성화작업만을 진행하면서 지냈다. 이때 성인이 하루의 식사로서 취한 것은 약간의 밀과 동굴 가까이 있는 계곡물이 전부였다.
넥타리오스 성인과 나눈 교제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거하는 땅을 다시 강탈하려는 이슬람교도들의 위협을 견디다 못한 성인은 그리스로 되돌아왔고, 이후 파트모스섬을 거쳐 다시 아토스산으로 갔다.(1916년) 어느 날 성인이 아테네에 잠시 머물렀을 때 성 넥타리오스(11월 9일) 펜타폴리스의 주교가 자신을 찾고 있음을 알고, 곧바로 에기나섬으로 가 넥타리오스 성인과 친교를 나누고 안식할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 그 후로도 수년동안 성인은 에기나의 수도원 가까운 곳에 거하였으며, 넥타리오스 성인과 나눈 교제는 이후 성인의 영적인 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기도와 희생과 헌신
침묵과 고요, 정적(靜寂, hesychia)을 사랑했던 성인은 많은 방문자들로 말미암아 에기나의 수도원이 붐비자 다시 그곳을 떠나 깔림노스 섬의 한 수도원에 정착하게 되었다.(1926년) 그곳의 한 수녀원 가까운 곳에 작은 거처를 마련한 성인은 이후 이십이 년 동안 규칙적으로 예배를 집전하고, 수녀들의 고백성사를 담당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쳤고,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 과부등을 보살폈다. 그러면서 성인은 자신을 위해서는 단지 성찬용 포도주나 로즈메리 액즙(液汁)을 조금 적신 ‘프로스포라’(prosphora, 성찬예배용으로 만든 봉헌빵) 몇 조각만으로 만족하며 끼니를 대신하였다. 또한 성인은 낮에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은 채 단 두 시간만을 잤고, 2차 세계대전의 고통스러운 기간 동안에는 사람들을 위해 밤새도록 선 채로 기도하곤 하였다.
지상에서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안 성인은 사흘동안 문을 걸어 잠근채 온전한 회개의 시간을 보내며 홀로 지냈다. 그리고는 1948년 4월 7일 그리스도의 사랑과 계명들에 대한 마지막 가르침을 베풀고 나서, 갑자기 손을 두드리면서 ‘주님, 주님, 주님!’하며 외치며 안식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한 수녀는 성인의 영혼이 황금빛 구름에 둘러싸인 채 천상의 음악과 함께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957년 성인의 무덤을 열자, 그곳에서 아름다운 향내가 퍼져 나와 그 마을의 끝까지 닿았다.
성인에 대한 시성(諡聖)은 1992년 세계 총대주교청에 의해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