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죄입니까?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요한 9,2)
제자들이 주님께 드린 질문은 당연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소경을 만난 순간 제자들은 그의 처지를 동정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서 저렇게 되었을까'하는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스승에게 물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하나의 큰 문제점을 제기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 있는 악의 문제입니다. 세상 악의 원인과 목적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동시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말대로 소경의 시련은 그 원인이 소경 자신에게 있을 수도 있고 그의 부모에게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겪는 고통스럽고 괴로운 그 많은 시련이 우리들 자신에게서 비롯된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불행의 원인이 부모나 우리와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일반적으로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고 특히 우리 삶에는 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악의 원인이건 우리 삶에는 악에 대한 다른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악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병고에 시달리든지 또는 어떤 고통을 받거나, 어떤 사고를 당할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불행을 당하게 되면 원망부터 합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닥칠까?',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기에 하느님께서 이런 시련을 주신단 말인가?', '하느님, 저에게는 고통만 주십니까?'라는 등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이렇게 원망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는 나중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불평불만과 강한 반발에 대해 중점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이런 모습은 시련의 시간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일지는 몰라도 좋은 자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조금도 유익할 것이 없습니다. 가장 좋은 자세는 제자들이 주님께 제기했던 것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는 것입니다. 즉 자신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이 불행의 원인이 나에게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라고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이런 자세가 영적인 사람으로서의 대처 방안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잘못과 죄를 인정할 줄 압니다. 그래서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내하며 희망을 품습니다. 이 자세가 회개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는 교회로 향하게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시련은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인도되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답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소경의 시련은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 즉 지혜와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