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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신앙/오늘의 축일

[1월 10일] 성 그레고리오스 니사의 주교

Ο Άγιος Γρηγόριος Επίσκοπος Νύσσης

 

성 그레고리오스 니사의 주교(1월 10일)


 

아버지에게 배우다

성인은 331년, 카파도키아(오늘날의 터키 동부)의 케사리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바실리오스(원로) 성인과 어머니 에멜리아 성인의 넷째 아들이며, 마크리나 성인(7월 19일)과 대 바실리오스 성인(1월 1일)의 동생이다.

형인 대 바실리오스 성인처럼 이름난 선생들을 찾아 대도시로 공부하러 가는 대신에 수사학(修辭學)의 대가인 아버지(원로 바실리오스 성인)에게 교육을 받았다. 어려서 세례를 받고 봉독자가 된 성인은 처음에는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고, 경건한 테오세비아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누나인 마크리나 성인과 그레고리 신학자 성인 그리고 형인 대 바실리오스 성인의 충고에 힘입어 마침내 수도생활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온유하고 겸손한 주교

370년 케사리아의 대주교가 된 대 바실리오스 성인은 ‘수도 규칙’을 마련하는 한편, 니케아의 제1차 세계 공의회에서 결정한 가르침들을 따르는 이들에게 박해를 가하는 무리에 맞서고 있었다.

이 무렵 조그만 마을 니사(Nyssa)의 주교가 된 성인은 이내 아리우스파 사람들로부터 고소 고발을 당했으나, 침묵과 무저항으로써 두 해 동안의 시련을 넘긴 뒤 378년에 다시 자신의 주교구로 돌아왔다.

그러나 379년 초 대 바실리오스 성인이 안식하자, 온유하고 말이 없는 성인이었지만 정교회의 올바른 가르침을 이단자들로부터 방어해야 하는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대번에 사람들은 성인의 깊은 신학적 통찰력과 설득력 있는 언변에 감동하여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정교회의 기둥’

이후 성인께서는 반세기 이상 지속한 안티오키아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폰토스와 아르메니아 교회를 재조직하는 한편, 극단적인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맞서서 정교회의 올바른 교리를 논증하는 글들을 썼다. 무엇보다도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세계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리우스 이단자들이 펼친 논거들의 허구성을 무너뜨리고 정교의 승리를 쟁취하였다.

공의회의 교부들에 의해 ‘정교회의 기둥’으로 칭송된 성인은 대 아타나시오스 성인과 대 바실리오스 성인의 합당한 계승자로서 여겨져 그 이후의 모든 교회 공의회와 회합에 참석하게 된다.

교회의 평화가 회복되고 아내(테오세비아 성인)가 먼저 안식한 386년경부터 완전한 영적 생활에 몰두하면서 정교회 신비신학의 대작(大作)들을 저술하고 평화로이 안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