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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영성/영성의 샘터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마르코 16,6)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마르코 16,6)


 

아직 새벽 동이 트지 않은 시간에 경건한 세 여인이 예수의 무덤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향료가 담긴 병이 꼭 쥐어져 있으며, 그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립니다. 분명 향료를 가지고 간 세 여인의 눈물은 값비싼 향료보다도 더욱더 값진 것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 여인들은 ‘예수의 몸에 발라 드리려고’(마르코 16,1) 향료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물은 주님에 대한 충성과 사랑으로 넘치는 가슴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둠도 군인들의 감시도 그녀들은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두려움을 쫓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걱정만이 있었습니다. ‘그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굴러 내려 줄 사람이 있을까요?’(마르코 16,3)

커다란 돌이 무덤 입구를 막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 향료를 든 여인들이 그 돌을 굴리고 주 예수의 몸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기적을 믿습니다. 무덤으로 가는 오르막길을 걷는 수고도 유다인들이 나중에 자신들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그들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예수에 대한 끝이 없는 그들의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이 이 여인들로 하여금 이러한 어려운 일을 감행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들이 곧 무덤에 도착해보니 놀랍게도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습니다. 절망이 잠시 그들의 희망을 가린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발길을 멈추지 않고 무덤 안까지 들어갑니다, 그리고 흰옷을 입은 한 천사를 봅니다. 천사는 예수께서는 부활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무덤 속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향료를 가지고 간 여인들처럼 누구나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몸에 향료를 발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의 우리 신자들은 어떻게 우리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몸에 보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특히 관심을 느끼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로께서 이에 대한 해답을 주십니다.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고린토 전 12,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 일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몸의 한 부분에 행한 일은 몸 전체에게 행한 것이 됩니다. 또한 각 부분은 다른 부분을 서로 도와야 하는데 그 이유는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골로사이 1,18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각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주님께서도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26,40)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주님께 보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가 우리에 수없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