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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신앙/신앙 탐구

우리의 삶과 성인들

 

우리의 삶과 성인들


우리 교회는 성인들을 공경한다. 그래서 매일같이 성인들의 축일을 정해 놓고 그분들을 기념한다. 성인 중에는 순교자들도 있고 수도자, 성직자 그리고 평신도들도 있다. 이들 성인의 삶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거룩한 삶이었고 교회를 위해 자아를 희생하는 삶이었다.

사람의 행위에는 반드시 어떤 목적이 있다. 사람들은 생일을 축하하는 잔치를 한다. 그 잔치는 그 사람의 세상 출생을 기념하며 건강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한다. 그리고 설날이라든지 추석 같은 명절을 정해 놓고 그날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대로 행하며 그날들을 뜻있게 지낸다.

 

그러면 교회가 정해 놓은 성인들의 축일 목적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우리 신앙생활에 특별한 의미를 주는 질문이며, 우리와 성인들의 관계를 잘 알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성인들은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요 대선배들이라 할 수 있다. 그분들은 믿음의 투사이고 용사들이었다. 성인들은 우리보다 먼저 살며 믿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분들이다. 이런 분들을 우리는 축일을 정해 놓고 다른 때에도 공경하지만 그날에는 특별한 송영(誦詠)으로 그분들의 공덕을 기리며 여러 가지 의식을 겸하여 공경한다. 그러면서 그 많은 용감한 믿음의 영웅들과 순교자들을 배출 시켜 주신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린다.

 

순교자, 고백자 같은 성인들의 덕분으로 우리는 오늘날 순수하고도 흠 없는 믿음을 간직하게 되었고 참하느님을 알고 경배하며 구원의 희망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성인들을 공경하며, 그 공경의 목적으로 축일을 정해 놓고 그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인들도 그리스도가 머리이신 교회라는 몸의 지체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도 같은 그 몸의 지체이다. 그러므로 성인들과 우리는 같은 몸의 한 조직이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관계가 서로 간의 사랑이 교류되는 교제로 나타난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성인들에게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중보해 주시기를 요청한다. 그러면 성인들은 그들의 거룩한 삶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렸으니 감히 하느님께 간청할 용기를 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이여, 우리를 위해 중보하소서”라고 요청하게 된다. 이때 성인들은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중보해 준다.

 

성인들을 위한 축일 제정의 또 다른 목적은 우리들이 성인들의 삶을 본받아 살게 하는 데에 있다. 성인들의 삶은 우리의 모범이 되고도 남는다. 그분들의 불굴의 믿음,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도 이겨내는 인내, 모든 것을 하느님께 거는 희망, 하느님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 어느 것 하나 모범 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분들의 생애에는 편안함과 안일함이 없었다. 고통과 시련 그리고 가난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분들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였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하신 말씀을 믿었다.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라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들로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성인들은 특별한 분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분들이 아무리 덕을 많이 쌓았다 하더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분들이라고 해서 우리보다 체력이 월등하게 강인했다거나 물질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말했다. “성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살다 보면 어떤 때에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만은 우리와 달랐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들의 분명한 의향이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네’라고 하였고 원하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하였다. 사랑에는 ‘네’이고 미움에는 ‘아니오’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닮고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따를 수 있었다.“

우리 교회의 위대한 성인이신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이 말씀으로 우리는 축일의 목적이 성인들을 공경하고 그분들의 모범을 따르는 데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성인들을 공경한다면 그 성인을 우리의 중보자로 삼고 그분의 삶을 본받아 성인들이 가지고 있던 영적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