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타나시오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1월 18일)
‘교회 놀이’에 열중하던 아이
성인은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황제의 박해(297-313)가 있기 직전인 296년 알렉산드리아의 경건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여러 가지 이교(異敎 cult)와 신앙들이 서로 뒤섞여 있는 세계적인 도시에 살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하느님과 교회에 관한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어느 날 알렉산더 주교는 어린 아타나시오스 성인이 자기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교회에서 행하는 예배 의식을 흉내 내며 노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린 아타나시오스 성인이 주교 역할을 맡아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어린이들의 세례 예식을 (짐짓 실제인 것처럼) 너무도 진지하게 행하는 것에 놀란 알렉산더 주교는 그 후로 아타나시오스 성인의 보호자(protector)가 되어 그를 돌보았다.
정교 신앙의 수호자가 되다
학생으로서 세속적인 학문보다는 성서를 깊이 묵상하고 덕을 쌓는 데 더 열심이었던 성인은 때때로 사막으로 가 평생의 영적 동료인 안토니오스 성인(1월 17일) 곁에 머물며 기도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보제가 된 성인은 갓 스무 살의 나이에 중요한 두 가지 신학적 저술(‘이교도들에 반대하며'[Against the Pagans], '말씀이 육화하심에 대하여’[On the Incarnation of the Word])을 완성하여 이교의 철학과 믿음이 그 얼마나 불합리하며 엉터리인가를 밝혀냈다.
그런데 이 무렵 논쟁을 즐기고 하느님의 신비를 신앙보다는 인간의 이성에 더 의지해 탐구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Arius)가 하느님의 말씀(곧, 예수 그리스도)은 영원한 분이 아니며 그 또한 창조된 분으로서 오로지 은유(隱喩)적인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따름이라는 주장을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난 아리우스는 다시 소아시아의 케사리아로 가서 제국 전체에 이런 혼란을 퍼뜨렸다.
이로 말미암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니케아에서 세계 공의회(325년)를 개최하여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명확한 교리를 확립하려고 하자, 성인은 보제로서 연로한 알렉산더 대주교를 모시고 그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이후 성인의 삶은 성부 하느님과 성자이신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가 본질상 같은(homoousios 호모우시오스) 분이라는 진리를 지키고 선포하는 데 바쳐지게 된다.
고난 속에 지켜낸 진리
알렉산더 대주교가 안식하자 알렉산드리아의 교인들이 만장일치로 성인을 총대주교직의 계승자로 선출하였다. 이후 성인은 이단자들에 대항하여 교회를 지키는 한편 이집트 전역과 에티오피아 국경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수도원을 찾아다니며 수도사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다섯 번의 추방을 감내하면서까지 진리를 지키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던 성인은 마침내 373년 5월 2일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인이 기초를 놓은 중요한 교리적, 신학적 작업은 이후 대 바실리오스 성인에 의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