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신조 제10조 - 결혼 성사 (2편)
- 남녀가 어떻게 낙원에서 동정의 삶과 같이 사는 것이 가능한가?
절제를 통해서이다. 부부관계를 절제하여 더 좋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축일들과 기도하는 기간이 존재하고 있음으로 그리스도인의 남녀는 절제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결혼의 목적은 부부가 절제하기 위하여 서로가 도와주어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 만약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절제를 못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고린토 전 7,4~5에서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한다. "아내는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남편에게 맡겨야 하며 남편 또한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아내에게 맡겨야 합니다. 서로 상대방의 요구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다만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서 서로 합의하여 얼마 동안 떨어져 있는 것은 무방합니다. 그러나 자제하는 힘이 없어서 사탄의 유혹에 빠질지도 모르니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로의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남녀는 꼭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말을 주의해서 보면 남녀가 절제하기 위하여 두 사람이 합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만약 한 사람이 절제하기 어려우면 상대방이 고집을 부려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부부사이의 사랑에 문제가 생길수 있기 때문이다.
금식 기간에 한 사람이 절제하기 힘들어하면 상대방이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가족의 평화를 깨는 잘못을 저지르게 하여 죄인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부부가 알아야 할 것은 합의(일치)는 절제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서로가 일치를 보지 못하는 절제는 무익한 것이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하고 있다. 또한 부인이 믿음이 좋고 경건하다고 하여 절제하지 못하는 남편과 관계를 맺는 것을 거절한다면 그의 믿음이 상대방을 해치는 동기가 되며 남편이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는 죄를 범하게 만드는 것이다.
디도 2,4~5에서 이와 관계된 말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그러면 젊은 여자들은 늙은 여자들의 훈련을 받아 자기 남편과 자식들을 사랑하게 되고 신중하고 순결하고 착한 여자가 되어 집안 살림을 잘하고 남편에게 복종하는 아내가 될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말씀이 모독을 당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사도 바울로의 고린토 전 7,5의 기혼자들에 대한 충고를 해석하고 있다. "서로 상대방의 요구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다만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서 서로 합의하여 얼마 동안 떨어져 있는 것은 무방합니다." 이 말뜻은 서로 합의하여 얼마 동안 떨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서로 상대방의 요구를 거절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 부부관계를 요구하면 상대방이 그것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만약 한 사람이 절제를 원하면 상대방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는 사도 바울로의 말을 해석하여 이렇게 말한다. "남편이 원하지 않으면 부인 혼자 절제하지 마시오. 또한 부인이 원하지 않으면 남편 혼자 절제하지 마시오." 왜 한 사람이 원하지 않으면 상대방도 절제하지 말아야 하는가? 왜냐하면 이러한 절제는 매우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성 요한 크리소스톰는 말한다. - 어떤 나쁜 결과가 생기는 것인가?
그것은 간음 욕정 가족의 붕괴 등이다. 왜냐하면 만약 자기 부인에게서 만족하지 않으면 다른 여자들에게 가는 남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 상대방의 요구를 거절하지 마십시오."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거절'은 한 사람이 상대방의 요구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한 사람이 거절할 경우 상대방은 다른 사람에게서 욕정을 채우려고 한다. '거절당하다'라는 말은 자기 소유를 무엇인가 다른 것에게 부정당하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결혼한 여인의 몸은 자기 것이 아닌 남편의 것이므로 자기의 몸을 남편에게 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편의 몸은 아내에게 종속되었으므로 아내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거절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것을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전 7,3~4에서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남편은 아내에게 남편으로서 할 일을 다하고 그와같이 남편에게 아내로서 할 일을 다하십시오. 아내는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남편에게 맡겨야 하며 남편 또한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아내에게 맡겨야 합니다."
부부사이에서 한 사람이 상대방의 종이라는 뜻은 즉 아내의 허락 없이 남편이 자기 몸을 절제하겠다고 내세우면 안 되는 것이고 아내 역시 남편의 허락 없이 자기 몸을 절제하겠다고 내세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들은 남편이 다른 여인과 관계하여 죄를 짓게 되는 것을 방지해 주고 아내가 다른 남자와 관계하여 죄짓게 되는 것을 방지해 준다.
어떤 낯선 여인이 남자에게 다가가 관계를 갖자고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려고 한다면 남자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나의 몸은 내 것이 아닌 나의 아내 것이므로 함부로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낯선 남자가 여인의 몸을 죄짓게 하려고 유혹한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닌 나의 남편 것이므로 함부로 하지 못한다."
사도 바울로는 "서로 상대방의 요구를 거절하지 마시오"하고 말하고 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무시하고 완고히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한 사람들은 경건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부인에게서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건함을 갖고자 절제를 원할수록 죄는 더욱 커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들의 남편을 다른 여인에게 가게 하여 죄를 짓게 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미루어보아 남녀는 서로 이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합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성 요한 크리소스톰는 말한다. 서로 상대방의 동의 없이 절제를 고집한다면 가족의 평화를 잃게 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는 이 문제를 더 구체화하였다. 한 부부가 있는데 남편의 동의 없이 아내가 절제하기를 고집한다고 상상해 보기로 하자. 만약 남편이 다른 여인에게 가버린다면 절제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왜냐하면 아내가 남편을 돌아서게 하였으니) 그런 짓을 안 한다고 하더라도 욕망의 불로 인하여 다투게 되어 아내로 인하여 수많은 문제점을 만들어 낼 것이 아닌가? 가정에서 사랑이 사라진다면 절제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전 7,5에서 서로 상대방의 요구를 거절하지 말라고 하였고 다만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서 서로 합의하여 얼마 동안 떨어져 있는 것은 무방하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사도 바울로는 기도 시간에 대한 중요성을 크게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부부관계를 갖더라도 기도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지만, 부부관계를 절제하게 되면 더욱더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로는 기도 시간이 되어 남녀가 서로 합의하여 절제한 이후에는 다시 정성적인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7,5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충고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두 사람이 원하면 더욱 긴 시간을 아니면 평생을 절제하며 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는 일정한 절제 기간이 끝나면 다시 관계를 가지라고 충고하는데 그것은 자제하는 힘이 없어서 사탄의 유혹에 빠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되풀이하여 말하면 그리스도인 부부는 결혼하고 그 안에서 동정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사도 바울로가 충고하듯이 일정한 기간을 서로 합의하여 절제하며 서로를 도와주도록 해야 한다. - 신비의 결혼성사에서 사제가 신랑 신부의 손을 맞잡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여기에는 매우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창세기 2,22을 읽어보면 하느님께서는 하와를 만드신 후 아담에게 데려오신 것을 볼 수 있다. 그처럼 사제는 오늘날 하느님을 대신하여 여자의 손을 남자의 손과 맞잡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결혼을 통해서 합치게 하여 사랑의 힘을 그들 사이에 주셨다. 이전에는 사제가 신부의 손과 신랑의 손을 맞잡게 하여 "주님의 성전에서 이 여인을 받아라"하고 말하였으나 오늘날에는 그 시간에 사제가 신랑 신부의 손을 잡게 하고 하느님께서 여인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결합시키시는 것을 상기하며 하느님께 이렇게 간청한다. "주여 비오니 드높은 주의 처소에서 팔을 펼치시어 여기 나온, 주의 종 ( )와 주의 종 ( )를 결합시키소서."
이 시간에는 그들이 서로를 이끌어주고 도와주며 일치하여 사랑하는 사이가 될 것을 하느님과 그들 사이에 약속을 한다. 또한 신랑 신부가 맞잡은 손은 그들 자신이 푸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오직 복음경을 통해서만이 풀 수가 있다. - 머리에 쓰는 화관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화관은 남녀의 결합을 축복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신랑 신부의 화관은 장차 얻게 될 자녀들에게 집안에서의 가장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함이기도 하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화관은 은이나 금속 물질로 만든 것으로서 신랑의 화관 앞쪽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 신부의 화관에는 동정녀의 형상이 그려져 있으며 마치 왕관의 모습과 같이 생겼다.
실제로 사람은 모든 창조물의 왕으로 창조되었다. 결혼성사의 둘째 기도에서 사제는 이렇게 기도한다. "전능하신 이여 당신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를 창조물의 왕이 되게 하셨나이다."
그리고 신랑 신부의 화관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 이전에 낙원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인간 탄생의 왕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는 "승리자들이 화관을 쓰는 것이다."라는 말로써 화관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신랑 신부는 그들의 삶에서 오는 모든 유혹과 싸우고 깨끗하고 순결한 삶을 지켜나가므로 그들의 투쟁에 대한 승리의 상을 교회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 결혼성사에서 사도경 봉독 끝부분에 "아내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다.
1)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고 평등하게 두 가지 성별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를 욕되게 하였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는 과일을 먹게끔 남자를 유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타락 이후에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는 체벌을 주셨다.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자의 손아귀에 들리라."(창세기 3,16) 즉 선조들의 타락 이후에 여자는 남자의 손에 달려있게 되었고 남자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다. 물론 타락 이전에는 이러한 종속관계가 없이 남녀는 동등하였다. 타락 이후 여자에게 주어진 체벌은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타락은 남자를 욕되게 하였고 죄로 물들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남녀는 다시 동등한 위치를 되찾게 되었으며 결혼성사를 통하여 그들의 관계가 동등하다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러나 여자는 사도 바울로가 말하듯이 남자에게 순종하는 자세를 잊어서는 안 된다.
2) 사도 바울로는 남녀의 밀접한 결합을 마치 그리스도와 교회가 합치는 형상으로 보고 있다. 남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며 여자는 교회의 형상이다. - 그리스도의 교회로 구성된 우리 그리스도인들 앞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신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대할 수 있겠는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두려움과 떨림이 함께할 것이다. 여자는 남자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보아야 하므로 주님을 영접하듯이 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을 영접할 때의 느낌과 같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대하여야 한다.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아내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라는 의미는 남편의 독재적인 권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해 갖는 사랑이 어떤 한정된 사랑이 아니고 영원한 것같이 남자의 사랑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남녀 중에 누가 가정을 이끌어 나가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에페소 5,21에서 사도 바울로가 모든 교회에 말하듯이 서로가 서로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정신으로 서로 복종하십시오." - 왜 그리스도께서 제일 먼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기적을 행하셨는가?
주님의 맨 처음 기적은 성찬 예배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찬 예배를 제정해 주셔서 우리가 신성화되어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희생당하신 것이다. 그래서 육화되셨다. - 그러면 성찬 예배는 어떻게 행하는가?
빵이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포도주는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피로 되는 것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기적은 성찬 예배에서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로 되는 기적을 앞서 보여준 것이다. 남녀가 성찬예배를 맛보아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먼저 성찬예배를 보여주셨다.
왜냐하면 성찬예배는 '감사성사'라고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찬예배를 결혼으로 표현한 것은 하느님과의 결합을 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회의 많은 성가 중에는 성찬예배가 결혼과 음식의 형상으로 표현되어 불리고 있다. - 신랑 신부가 마시는 잔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공동의 잔'이라고 부르는데 남녀 두 사람이 마실 인생의 공통된 잔을 상징하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가족이 겪어야 할 기쁨 슬픔 감사 실망 등을 두 사람이 같이 겪으며 이끌어 나가야 한다. 즉 공동의 잔은 선한 삶을 사는 신랑 신부의 완전한 결합을 나타내는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 잔을 '결합'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 잔에 물과 포도주를 섞는데 이것은 남녀의 마음의 결합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 왜 사제는 신랑 신부와 함께 예식상 주위를 세 번 도는가?
이 예식상은 제단을 대신한다. 그러므로 그곳에 성서를 놓는 것인데 반지와 화관은 먼저 제단 위에 놓여져 있었다.
사제는 신랑과 신부 그리고 증인과 같이 예식상 주위를 돈다.(사제는 신랑을 잡고 신랑은 신부를 잡으며 증인은 화관의 끈을 잡고 돈다.)
그리고 제단 가까이 그들을 인도하며 큰소리로 교인들과 같이 성가를 부른다.(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사야 예언자여 기뻐하소서…….)
도는 형태는 둥근 모습으로 형성되는데 이것은 영원을 의미하며 교회는 신랑 신부가 영원을 얻을 수 있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 결혼성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왜 사제가 신랑 신부의 화관을 가져가는 것인가?
이것을 '화관들림'이라고 부른다. 이전에는 신랑 신부가 화관을 쓴 채 결혼성사를 마친 후 신랑의 집에까지 화관을 쓰고 갔다. 그곳에서 신부는 올렸던 머리를 내리는데 그것은 결혼한 여자라는 것을 의미하며 신랑은 한 다발의 열쇠를 신부에게 건네주는데 그것은 집의 안주인인 부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칠 일 동안 화관을 쓰고 지내며 여드레째 되는 날 결혼식 때 축복을 받았던 것과 같이 그들의 머리에서 화관을 걷기 위해 성전으로 가고 사제는 화관을 걷어 교회에 두는데 그것은 그들이 성당에 속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성사의 끝부분에 '여드레째 되는 날 화관을 벗기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몇몇 지역에서는 아직도 이 풍습을 지키고 있으나 오늘날에는 신랑 신부가 여드레째 되는 날 성당에 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으로 화관들림은 성사 마지막에 가서 사제가 걷고 있다.
그러나 예전에 행했던 풍습을 지키는 것이 더 좋은데 그것은 신랑 신부가 화관을 쓰고 기뻐하며 결혼을 주의 깊게 의식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