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신앙의 신조 제11조 - 죽은 이들의 부활 (3편)

 

신앙의 신조 제11조 - "죽은 이들의 부활과..."


  • "델로니아"(방벽)이란 무엇인가? "
    "델로니아"의 정의는 히브리 민족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며 오늘날에는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영혼을 방해하는 방벽들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어 사용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이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에 도시 중앙길에 "델로니아"가 있어 그곳을 지나가는 유대인들은 통행료를 내야만 했었다. 마치 오늘날 고속도로를 가려고 할 때 요금을 내는 요금소(톨게이트) 같은 곳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끼릴로스는 "죽은 이후 영혼이 만나는 대기권에 있는 고통의 장소"로 표현하고 있다. 그 밖에 이집트의 성 마카리오스와 그리고 성 요한 클리마코스 등 많은 성인이 여기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사람이 죽은 직후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하여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과 장례식 그리고 성찬예배는 영혼이 "델로니아"를 지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끼릴로스는 "사람이 죽은 뒤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그의 앞에 그를 데려가기 위한 하느님의 천사들과 그의 행적에 대해 비난하는 악마들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을 본 영혼은 악마들이 무섭고 두려워 하느님의 천사들에게 보호를 요청한다. 그러면 천사들은 영혼을 그들의 보호 속에 높은 곳으로 데리고 올라간다. 그러나 영혼은 대기권을 지나면서 하늘로 가기 위한 길을 방해하는 "델로니아"를 만나게 된다.
    각 "델로니아"는 영혼에게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델로니아"를 지나기 위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죽은 후 매우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 왜 추도식에 꼴리바를 갖고 가는가?
    꼴리바는 삶은 곡식에 설탕 꿀 포도 그리고 그 외에 다른 달콤한 것들을 섞어 만든 것인데 상징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곡식은 언젠가 무덤에서 부활할 죽은 이의 몸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곡식은 땅에 뿌려지고 썩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성한 과일을 맺는 나무로 되살아난다.
    설탕과 꿀 그리고 그 밖의 달콤한 것들은 부활한 후에 낙원에서 행복한 삶과 기쁨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의 기도가 죽은 이의 영혼을 이롭게 한다면 꼴리바를 갖고 교회에 가는 것은 죽은 이들의 부활과 죽은 이후 더 좋은 삶을 나타내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앞두고 성체성혈을 영접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죽음 직전에 성체성혈을 영접하며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는 어떤 사건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그 사건은 라부라에 위치한 성 세르기오스와 성삼위의 수도원장인 대사제 안토니오스의 삶에서 있었다.
    안토니오스 대사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가 라부라에 있는 성 세르기오스와 성삼위의 수도원에 왔을 때 약간의 수도자들이 있었고 보제는 한 명도 없었다.
    수도원장으로 부임한 얼마 후에 어떤 교구에서 보제 한 명이 왔고 그는 다른 수도자들과 잘 어울렸다. 그는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고 수도원에서 보조자로서 봉사하였다.
    수도원의 축일이 있기 며칠 전에 보제는 수도원장 안토니오스에게 집에 일이 있어 갔다 올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그 요청을 들은 수도원장은 갔다 오라고 허락하며 다시 말하였다. "그러나 축일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누구와 같이 예배를 집전할 수 있는가?" 그러자 보제는 "축일에 맞추어 도착하겠습니다. 빨리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축일 아침까지도 보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수도원장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예배가 시작되어 얼마가 지나자 보제가 도착하였고 그를 본 수도원장은 그에게 준비가 되었으면 예배를 같이 집전하자고 말하였다.
    성찬예배가 끝난 후 식사를 함께하면서 어떤 수도자가 보제의 목소리에 대해 "누군가가 집에 가서 그의 목소리를 두고 왔다."하며 오늘은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고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보제는 신경이 예민해졌고 그들 사이에는 다툼이 오갔다.
    그런 후 보제는 그의 거처로 돌아가 물통을 들고 물을 길러갔다. 그러나 그는 통에 물을 가득히 채우고 그의 거처로 돌아와 문을 열자마자 갑자기 땅에 쓰러져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안토니오스 수도원장은 매우 당황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보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보제가 축일 전에 도착하라는 명을 듣고 급히 와서 예배에 참여하여 고생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수도원장은 죽은 보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모든 지역에 이 소식을 전하여 성찬예배에서 그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글을 써서 보냈다.
    그가 죽은 지 사십일째 되는 날 안토니오스 수도원장이 그의 방에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그는 벌떡 일어나서 불을 켰고 그의 앞에 보제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신께 감사드리러 왔습니다."하고 보제는 말하였다. "왜지?" "당신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기 때문이지요." "나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수도자가 그대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기도해 달라고 모든 곳에 그대의 이름을 적어 보냈다." "내 이름은 어느 곳에도 기록되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수도원장은 누군가의 실수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델로니아'를 어떻게 통과했느냐?" "마치 번개와 같이 통과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통과할 수가 있었지?" "왜냐하면 죽기 전에 성찬예배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접하였기 때문입니다." "식사할 때에 다른 수도자와 다툰 것에 대하여는 어떻게 되었는가?" "주님께서 그것에 대하여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다른 수녀원에서 수녀 한 명이 죽었는데 수도원장은 보제에게 그녀는 어떤 상급을 받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녀는 저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하며 보제는 대답하였고 수도원장의 영상은 여기에서 끝났다.

  • 믿음이 전혀 없었고 경건한 삶을 살려고 전혀 노력하지 않은 채 죽은 자들을 위하여 추도식이나 자선이 필요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추도식이나 자선은 오직 믿음으로 잠이든 자들만을 위해서 필요하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잠든 형제들을 위하여 성찬예배에서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들에게 이롭고 많은 것을 얻게 해 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믿음으로 잠든 이들을 위하여) 추도식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성 요한 다미스키노스의 문헌에서도 추도식에 대하여 "죄인들이었을지라도 착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고치려고 하였으나 미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믿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롭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경하고 음흉한 삶을 살고 그들의 영혼에 관해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는 추도식이 필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