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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영성/말씀과 함께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라.”

소티리오스 대주교

 


지난 설교에서 우리는 구복단의 첫 번째 가르침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앞부분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겸손의 미덕을 축복하시며, 이기심과 자기애가 초래하는 모든 결과들을 정죄하십니다. 동시에, 자신이 영적 미덕이 부족함을 느끼며 끊임없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겸손한 자에게는, ‘하느님 나라’라는 최고의 상을 보상으로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축복하시는 이들에게 보상으로 주시는 ‘하늘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처음부터 잘 알아두어야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관찰한 바와 같이 주님은 구복단의 첫 번째 미덕으로 축복을 받는 자들에게 현재 시제를 사용하십니다. 세상의 종말과 세상의 심판 이후에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미루고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 이 사람들(구복단의 첫 번째 부분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지금부터 하늘나라를 보장받는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마음이 가난한 자들”, 즉 겸손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은총을 자신의 영혼에 끌어당깁니다. 그 영혼은 성화되어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 살아갑니다. “하느님 나라(예수님)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 17,21)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곳에서부터, 즉 지상의 삶에서부터 그리스도를 내면에 모시고 있으니, 벌써부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맛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 행복은 앞으로도 계속, 최고의 수준으로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는 겸손한 이들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늘나라의 행복은 현실 밖에 존재하는 막연하거나 상상의 것이 아닙니다. 이 행복과 기쁨과 즐거움은 세상의 심판 이후에 시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기쁨은 지금부터 존재하며, 손에 잡히는 현실입니다. 이는 겸손한 생각과 마음과 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께서 상으로 주시는 값진 선물입니다. 이 상은 주님께서 이생에서는 분할하고 나눠서 주시지만, 다음 세상에서는 온전하고 영원한 모습으로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상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요?

 

첫째, 하느님께서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이생에서 주시는 상은 양심의 평안, 내적 정신적 평안,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때 느끼는 외적 평안입니다. 겸손한 이들은 내적 평화를 느낍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영적 빈곤을 인식하고, 진실한 회개에 의지하며, 하느님의 은총을 끌어당기고, 하느님께서 은총을 통해 자신을 용서해 주셨으며 자신을 하느님의 보화를 물려줄 상속자로 삼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내면에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에 대해 거창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들로부터 어떤 책망이나 비난을 받진 않을까 염려하지 않으며, 자신에 대해 자랑하려고 하지도 않고, 세상의 칭찬을 들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또, 남들로부터 쓴 말과 거짓 비난을 들어도 쉽게 동요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 오해하고 비난할 때면, 주님께서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으며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셨”(1 베드로 2,23)던 것처럼, 침착하고 평화롭게 그 상황에 대처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겸손이 그를 시기와 질투, 간계와 허영심과 교만의 사악한 계획에서 자유롭게 해 주었기 때문에 내면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겸손은 이 모든 것들에서 그를 자유롭게 해 주었고, 반대로 그의 영혼에 순수한 정직성과 모든 사람에 대한 진실한 친절을 심어주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내면의 평화를 느끼고, 또 자신의 가정에서도 평화를 누립니다. 왜냐하면 지출이 적고, 소박하고 작은 것으로도 만족하며, 사람을 대개 경제적 어려움과 파탄으로 몰아넣는 탐욕적인 소비생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겸손은, 다가올 세상에서,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생에서, 온전한 보상을 받습니다. 현세에서 그 상을 미리 맛보는 것이 우리 영혼에게 그토록 큰 기쁨과 만족을 준다면,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받을 상은, 앞서 말했듯이, 최고의 기쁨과 행복을 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늘나라의 행복에 대해 묘사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보화들은, 아직 이 세상에 있을 때 합당해져서 하늘나라를 보게 된 사도 바울로가 말하듯,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1 고린토 2,9 참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주는 것을 바탕으로 하늘나라가 어떤 곳일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복 받은 겸손한 자들에 대해, “아버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아버지께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주신 그 영광을 그들도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24)라고 당신의 소망을 표현하셨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에 대해 더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요한묵시록 21,4) 즉, 비유적인 이 표현들은 사람들의 깊은 열망들, 즉, 기쁨에 대한 열망, 생명에 대한 열망, 지식에 대한 열망, 참된 영광에 대한 열망, 그리고 사랑에 대한 열망이 완전히, 영원하게 이루어지게 해 줄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지상에서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완전하고 지속적인 것이 아닙니다.

행복의 근원은 소망을 심어주시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확증해 주신 주님이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