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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영성/영성의 샘터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이다

방그라띠오스 대신부


오순절 다음 주일 교회에서 봉독 되는 사도경의 구절은 인내에 대한 하나의 찬양사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하늘나라를 갈망하며 거룩하게 산 이들이 불굴의 의지와 인내로 그들에게 닥쳐오는 고통과 시련과 박해 그리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대처해 나아간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울로께서는 구약 시대의 사례들을 들며 인내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하셨다. 성서에서 인내의 필요성이 강조된 것은 물론 여기서 뿐이 아니다. 두 가지 경우를 더 들어보기로 하자. 사도 바울로는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하느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히브리 10:36)

그리고 주님께서도 인내가 구원을 가져온다는 뜻에서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루가 21,19)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에게는 구약 시대의 의인들과 그 후의 성인들에게서 겪으신 시련 속에서 우리 각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무서운 시련을 겪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좀 가벼운 시련을 당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시련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시련이 의인들이나 성인들께서 겪으신 시련과 같지는 않다 하더라도 시련에 대처하는 자세는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사도 바울로께서 옛 의인들을 실례로 들어 그들이 받은 고통을 상기시키는 것은 그 당시의 역사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서간을 읽는 사람들의 시련에 대한 영적 대처를 촉구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의 구원에 목적을 두고 사람들이 당시의 의인들이나 성인들이 가졌던 시련에 대한 자세를 본받아 영적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교부들께서는 성인들과 순교자들을 가장 잘 추모하고 공경하는 방법은 성인들과 순교자들을 닮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 닮음은 형식적인 닮음이 아니다. 그 당시 성인들에게 있었던 그런 시련의 유형과 그 시련 극복 방법을 닮으라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도 그 옛날 하느님의 사람들일 톱질당하고 찢기고 매 맞는 것 같은 고통을 우리에게 그대로 허락해 주시지는 않을 것이다.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사건이 같은 방법으로 반복된다는 것은 아니다. 

성인들이 원하시는 닮음은 내적인 닮음, 즉 영적인 것이다.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영성으로 호흡하고 그분들의 영적 자세를 오늘날의 우리들의 내면에 새겨놓고 그것을 본받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께서는 구약의 의인들과 성인들의 무리를 구름과 같다고 하셨다. 

이 구름 떼가 어디서나 우리를 둘러싸고 덮어 준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 모두에게 이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인도를 받아 소용없는 일들과 무익한 일들을 그만두고 영적인 면에 치중하라고 권고하신다. 

최적인 일들에 관여하지 말고 확고한 의지와 인내로 그리스도의 길을 가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자료에 의하면 초기 3세기 동안에만 약 천백만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이유로 희생당했다. 그들이 당한 고문과 형벌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굴의 의지로 참고 이겨냈다. 40인 순교자들이 그 무서운 고통을 이겨낸 이야기는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그들은 얼음판에서 발이 얻어 들어가는 추위를 이겨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추위는 혹독하지만 천국은 안락하다. 천국에서 영원히 춤추게 될 것이니 발이야 얼어 떨어진들 어떠랴?

이와 같은 천국에 대한 기대와 하느님 곁에서의 영원한 기쁨의 희망으로 우리 영혼은 힘을 얻고 인내력을 키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과 그리고 하느님과 사도들의 말씀으로 날마다 인내심을 키워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모범이 우리들에게 인내를 가르쳐주고 그 정신을 심어준다. 

인내는 어떤 화려한 경력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영적 필수 요건이며 우리 구원의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