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1년에 2번, '영혼 토요일' 추도식을 거행한다. 사순절을 앞둔 금육 주일 전 토요일과 오순절 전 토요일이 그날인데, 안식한 모든 이들을 기억하며 꼴리바를 만들어 추도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왜 안식한 이들을 위해 추도식을 거행하는가?
사람은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며 부패하므로 생명이 없다고 한다. 보통 눈에 보이는 외적 현상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모두 육신만이지, 삶 자체가 멈춘 것은 아니다.
한번은 죽은 다음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것을 믿지 않던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죽은 다음의 삶과 연관되는 질문을 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출애굽 3, 6)라고 하셨다.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다. 이 말씀만 보더라도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살아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루가 20, 37~38 참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던 때는 신앙의 선조들이 육신적으로 안식한 지 이천 년이 지난 뒤였다. 하느님에게는 모두가 살아있는 자들이지만, 우리에게는 육신적인 이유로 죽은 자들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육적인 눈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도 볼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가 살아있는 자들이다. 아담과 하와도, 노아와 카인도, 다윗과 빌라도도, 그리고 우리 조상들도 모두가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물질적 도움을 주는 것보다 더 신성하고 중요하다. 모든 것은 전능하신 하느님께 달려있지 않은가! 특히 육적으로 아무 도움이 필요 없는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는 더욱더 그렇다.
무엇을 어떻게 안식한 이들을 위해 해야 하는가?
- 우리는 그분들을 위해 개인적으로 기도한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 사제에게 안식한 이들의 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혈로 씻기도록 성찬예배에서 기억해 주실 것을 부탁한다. 이것이 우리와 육적으로 죽은 가족이나 친지들을 위해 가장 큰 축복이다.
- 사제에게 안식한 이들의 죄의 사함을 기원하는 추도식을 거행해 달라고 요청한다. 주님께서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인 주교와 사제에게 하신 말씀은 분명하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있을 것이다."(마태오 18, 18)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사제들의 기원을 들어 주신다는 말씀이다. 성 대 아타나시오스는 사제의 직분 특히 죄 사함의 권한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사제의 기도에는 성인의 기도와 대등한 힘이 있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돌아가신 이들을 위한 사제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그런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제 때문이 아니다. 기도나 추도식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그 원인이 있다. 교회의 가르침은 몇 가지 경우에서 사제의 기도나 추도식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한다.
- 하느님께서 고인을 벌써 데려가신 데 대해 고인의 유족이 불만을 품을 때이다. 그러나 지극히 선하신 멘멘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으로서 우리가 잘되길 바라시며,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지 우리보다 더 원하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 유족들이 미신이나 사탄적인 행위로 고인을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하게 할 때이다.
- 사제에게 불경스럽게 대할 때이다. 이런 행위는 하느님을 진노하시게 한다. 사제를 존경하며 겸손하고 정중하게 요청하여야 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저승에 내려가셔서 자비를 베푸시고 갇힌 영혼을 해방시켜 주셨다. 그때 저승은 빛과 자유와 기쁨과 평화로 충만하였다.
우리가 올리는 추도식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시기를 기원하며 고통도 슬픔도 한숨도 없고 빛과 기쁨이 충만한 그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