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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신앙/오늘의 축일

[1월 21일] 성 막시모스 고백자

Ὁ Ὅσιος Μάξιμος ὁ Ὁμολογητής

 

성 막시모스 고백자 (1월 21일)


황제의 수석비서

성인께서는 580년 콘스탄티노플의 한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매우 뛰어난 지적, 철학적 능력을 지녔던 성인은 탁월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정치적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610년 즉위한 이라끌리오스(Heraclius) 황제는 성인을 수석비서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부와 권력, 명예도 ‘참된 철학’(곧, 하느님에 관한 지혜)을 알고 싶은, 어린 시절부터 성인의 마음속에 있었던 갈망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단지 3년만 복무한 뒤 성인은 흐리소폴리스(스쿠타리[Scutari], 현대의 우스쿠다르[Uskudar: 터키 이스탄불의 보스포로스 해협 아시아 쪽 해변 남쪽의 한 지역])의 성모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성서와 교부들의 저작을 통해 영적으로 잘 준비되었던 성인은 이후 기도와 수덕(修德)의 삶으로 말미암아 매우 지고(至高)한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단성론 이단

이처럼 고요(헤시키아[hesychia]) 속에서 12년을 보낸 성인은 다시금 제자인 아나스타시오스와 함께 키지코스(Cyzicus)의 성 요르고스 수도원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초기 저술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626년 아바르족(Avars)과 페르시아인들이 연합하여 제국의 수도를 공격해옴에 따라 이리저리 떠도는 삶을 살았고, 이런 과정에서 크레테와 키프로스를 거쳐 632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른 수도사들과 함께 팔레스타인을 떠나 피신해 있던 소프로니오스 성인(3월 11일, 예루살렘 총대주교)을 만나 그의 영적 지도를 받음과 동시에 그즈음 극심해진 단성론(單性論, Monophysite) 이단 신학자들과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정교(正敎)를 위한 투쟁

전쟁으로 말미암은 국가, 정치적 위협과 이단자들로 인한 신앙의 위기가 함께 맞물려 광풍(狂風)처럼 휘몰아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인은 그 어떤 권력이나 종교적 권위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오로지 올바른 가르침[正敎, Orthodoxy]을 수호하는 데만 당신의 전부를 바쳤다.

648년 콘스탄스 황제(Constans II, 641-668)에 의한 신학 논쟁 금지조치와 서방의 라테란(Lateran) 공의회(649), 그리고 이로 인한 로마 교황 마르틴 1세(Martin I, 4월 13일)의 죽음(655년)을 겪고 나서 성인 또한 체포되어 투옥되고 재판에 넘겨졌으며, 협박과 회유에 굴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유배되어 고문을 당한 뒤 혀와 오른손이 잘리고 나서 다시 코카서스의 라지카(Lazica: 오늘날 그루지야 서쪽 지역)에 있는 외딴 요새에 투옥되었다가 662년 82세에 안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