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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신앙/교리문답

신앙의 신조 제10조 - 결혼 성사 (1편)

 

신앙의 신조 제10조 - 결혼 성사 (1편)


  • 결혼성사란 무엇인가?
    결혼성사는 남녀가 교회에서 사제 앞에 서서 서로 믿고 사랑할 것을 약속하고 사제는 그들의 결합을 마치 그리스도와 교회가 결합하는 표상같이 축복해주는 신비의 성사이며 그럼으로써 거룩한 은총이 그들에게 내려 서로가 사랑하며 존중하여 자녀를 낳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 왜 결혼성사에서 여러 가지 연도를 하는 것인가?
    초대교회에서 결혼성사는 성찬예배 시간에 거행되었으므로 여러 가지 기원 연도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찬예배와 분리되어 결혼성사를 거행하며 그 가운데 기원 연도를 하는 데에는 좀 더 중요한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결혼성사는 신랑 신부만의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결혼을 축하하고 기뻐하고자 하는 모든 교회의 기쁨이기도 하다. 또한 신랑 신부의 새로운 생활은 기원 연도에서 언급하는 주교를 비롯하여 모든 성직자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는 교회의 삶의 골격에 들어오는 것이다.

  • 결혼성사를 위하여 신랑 신부는 어떤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하며 교회는 그들의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 그러면 자식이 배우자에게서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는데도 부모가 결혼하라고 강요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인가?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좋은 배우자를 선택해 주는 것이 의무이지만 자식이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데도 결혼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창세기 24,58을 보면 리브가의 부모가 그녀를 불러 이삭과 결혼을 하러 따라갈 것이냐며 그녀의 의향을 물어보는 좋은 예를 볼 수 있다. "그들이 말하였다. '그러시다면 그 애를 불러서 물어봅시다.' 그들은 리브가를 블러서 '이 어른과 같이 갈 마음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리브가가 대답하였다. '예 가겠습니다.'"

  • 결혼성사에 오는 신랑 신부를 보고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그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신성함과 기쁨으로써 알 수가 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옆구리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다.남자는 빼어진 갈비뼈 즉 여자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야 하며 여자는 그 뼈가 있던 곳 즉 남자에게로 되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야 한다. 이것이 남녀의 흡수 관계이다. 남녀가 서로 나누어졌을 때 그들 사이는 하나가 아닌 부분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바실리오스 성인이 말한 것과 같이 '사랑의 힘'을 주시어 두 사람이 결혼을 통하여 결합하게 하여 완전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남자는 옆구리뼈 하나가 빠져나갔으므로 그 혼자서는 완전한 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자 역시 뼈 하나 가지고서는 완전한 몸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결혼을 통한 두 사람의 결합은 완전한 것을 부여해준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끈으로 새로운 부부를 결합해 주신다. 왜냐하면, 이분만이 모든 것을 만족하게 해 주시는 분이시며 둘을 하나로 결합시킬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결혼성사 전 약혼식에서의 기도문은 이것에 대하여 잘 표현하고 있다. "영원하신 하느님이시여 주는 흩어진 이들을 한데 모으시고 풀리지 않는 사랑의 끈으로 그들을 묶으시나이다." 우리는 이 기도문에서 표현하는 것을 주의하도록 해야 한다. 흩어진 이들은 따로 떨어져 있었던 신랑 신부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한데 묶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관계를 흡수시키시고 일체가 되도록 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한데 모으시고'라는 표현은 초대 성찬예배에서 봉헌물(빵)에 대한 기원을 생각나게 한다. 봉헌물은 여러 밀알을 채취하여 한데 모아 밀가루로 반죽하여 신비의 감사성사를 거행하도록 봉헌물로 만들어진다.
    마찬가지로 신랑 신부도 처음에는 따로 떨어져 있었지만, 후에 하느님께서 결합해 주시는 것이다.

  • 신랑 신부가 손가락에 끼는 반지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반지는 예수님 이전부터 사용되었었다. 반지는 크게 두 가지 우상 숭배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의미에서 그 뜻을 찾아볼 수가 있다.
    먼저 우상 숭배자들에게서 반지는 여자를 노예로서 금속과 사슬로 묶는 것으로 나타내어 남자가 여자를 소유하여 위세 부리기 위한 야만적인 풍습으로 비롯되었다. 우상 숭배자들에게 있어서 반지의 또 다른 의미로는 남자가 여자를 샀다는 표징으로도 사용하였었다. 또 다른 의미로서는 남자가 여자를 집안을 돌보는 대표자로 세우는 권위 의식으로서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남자가 여자에게 반지를 주는 것은 집안 주인으로서 집을 잘 돌보고 가꾸라는 의미였다.
    그리스도인들의 결혼성사에서 반지를 서로 바꿔 끼는 것은 둘이 서로 협조하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남자는 그 자신을 여자에게 주고 여자도 그 자신을 남자에게 주어 서로가 상부상조하여 합치라는 것이다.

  • 결혼성사를 거행할 때, 증인이 나와 신랑 신부의 반지를 바꿔 끼워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반지를 바꿔 끼워주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완성하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면 능력이 있는 다른 사람이 보충하여 완성하라는 것이다.
    앞서도 말하였듯이 남자 혼자 또는 여자 혼자로서는 인간의 완전성을 구성할 수가 없다. 결혼을 통하여 서로의 완성이 이루어지며 반지를 교환함으로써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 교회는 결혼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서로가 상부상조하여 완성하는 것이다.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목적은 구원론적인 것이다. 서로가 상대방을 도와주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결혼 이외의 일반적인 각 사람에게서도 그러한 요소를 찾을 수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사회에서도 한 사람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면 능력 있는 다른 사람이 완성하게 하여 구원의 길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녀가 결혼한다는 것은 그 이외에도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인데 그것은 자녀를 얻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결혼의 목적이 자녀를 낳기 위한 것인가?
    자녀를 낳는 것은 물론이고 먼저 서로의 완성을 갖도록 해야 한다.
    결혼성사를 거행하기 전 약혼식에서의 세 번째 기도문에서는 결혼에 대한 남녀의 조화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여자를 남자에게 맺어 주시어 그를 도와주고 인류의 혈통을 잇게 하셨나이다." 여기서 언급하듯이 먼저 서로 '돕고' 후에 '혈통을 잇게' 하기 위하여 자녀를 가지라는 것이다.
    교회는 결혼의 주된 목적이 자녀를 낳는 것만이라고 한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녀를 낳지 못한다고 하여 슬퍼하거나 고통을 받는 불행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수의 유대인은 결혼의 주된 목적을 자녀 생산에 두었으므로 자녀를 얻은 뒤에는 부인을 버리는 경우가 많았었다. 말라기 2,15을 보면 결혼에 대한 것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 말뜻을 잘못 해석하면 하느님께서 결혼의 목적을 자녀 생산에만 한정 시켜 말씀하신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데 그 뜻이 아니고 자녀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부가 헤어지지 말고 살라는 말씀이다. "주께서 너희의 몸과 마음을 묶으실 때 무엇을 바라셨겠느냐? 하느님께서는 후손을 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 변심하여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도록 하여라."

  • 부부관계를 맺는 것은 자녀를 낳기 위함이 아닌가?
    부부관계를 맺는 것은 자녀를 생산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자녀를 생산하는 것은 하느님의 천지창조에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의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톰는 부부관계는 아이를 생산하기 위함이나 "그러나 육정은 될 수 있으면 잠재우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육정에 대하여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음행이 성행하고 있으니 남자는 각각 자기 아내를 가지고 여자는 각각 자기 남편을 가지도록 하십시오."(고린토 전 7,2)
    사도 바울로는 여기에서 자녀 생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계속하여 사도 바울로는 5절과 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제하는 힘이 없어서 사탄의 유혹에 빠질지도 모르니 …… 그러나 자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 이렇게 결혼은 인간을 타락으로부터 지켜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는 결혼은 타락을 피하게 해줄뿐더러 인구증가도 가져다준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인구 팽창으로 인하여 결혼은 오직 타락과 욕정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사도 바울로와 성 요한 크리소스톰이 위에서 언급한 것은 사도 바울로의 편지 해석과 관계가 있다.
    사도 바울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고린토 지방의 우상 숭배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욕정의 문제점과 그들 사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것에서 피하도록 하기 위하여 보낸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육체관계는 오직 부부 사이에서만 허락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육체관계의 욕망으로 인한 욕정은 오직 결혼만이 탈출구이며 부부사이에서만 육체관계를 허락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 교부들은 결혼은 신비의 성사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서로가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목적이 있으며 부부관계를 통하여 그에 대한 결실인 자녀를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적인 목표와 그리스도인들이 책임져야 할 것은 육체를 절제하고 단련하여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승리하는 것이다.

  • 왜 남녀가 육체관계를 절제하여 육적인 정욕으로부터 이기도록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욕정이 죄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한 욕정은 위에서 말하였듯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결혼은 그것을 채워주고 만족을 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질문에 대하여 결혼과 관계된 더욱더 깊은 이야기를 하도록 해본다.
    성 교부들은 만약 선조들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동정의 방법으로 식물이 자라 가지를 뻗어 성장하는 것과 같이 하느님의 지혜로서 동정의 방법으로 인구가 증가하였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육체관계를 맺게 된 결혼은 창세기 4,1에서 보듯이 타락한 이후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을 두고 결혼이 죄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은 죄가 아니나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왜냐하면 낙원에서 사는 동정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 결혼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수도자와 수녀가 되는가?
    이들은 원초적인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는 결혼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초자연적인 길을 걷고 있다. 이들이 동정의 길을 결정한 것은 한 단계 높은 경지로서 그것은 타락의 틀을 벗어나 천국의 상태이었던 동정의 삶으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동정의 삶은 자연적이 아닌 초자연적인 상태로서 이 삶을 열심히 살아가기로 한 사람은 명백한 하느님의 부르심이다. 이상 위에서 말한 것을 다시 정리해 보기로 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어 동정으로 살아가도록 낙원에 두셨다. 그러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옷을 입게 되었고 육체의 욕망을 가져와 그것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욕정의 타락과 비윤리적으로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것을 막고 육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결혼이 있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전 7,2에서 이것에 대하여 명백히 말한다. "그러나 음행이 성행하고 있으니 남자는 각각 자기 아내를 가지고 여자는 각각 자기 남편을 가지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결혼은 단순히 타락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결혼은 서로가 교류하는 것이다. 자연적인 사랑은 나를 벗어나 다른 사람이 친교에 나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신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러한 사랑의 예는 개인적인 움직임에서 전체적인 친교로 이끌어 가게 한다. 그러나 사랑이 개인적인 만족으로 제한될 때에는 퇴색되며 대상이 파멸하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결혼은 결혼성사의 둘째 기원문에서도 말하듯이 부부관계가 오직 '육신의 조화'뿐만이 아니고 구원을 위하여 서로 도와주고 완성하도록 '영적인 조화'가 주된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 교회는 그들을 부르고 교인들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만족할 수 있도록 신랑 신부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내리시기를 신비의 결혼성사에서 모두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결혼은 또한 육적인 것에 승리하여 낙원에서의 동정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남녀를 도와주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할 일인 것이다.
    신비의 성사들은 타락에서 낙원으로 인도하여 준다.

 

‘신앙의 신조 제10조, 결혼성사’ -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