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교회 영성/말씀과 함께

임마누엘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요한1서 4,18)  

 

임마누엘

(소티리오스 대주교)


우리는 성탄절이 지난 다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임마누엘이라고 부르는 것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탄생 8세기 전에 이 이름을 처음 언급했습니다.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 그리고 마태오 복음 1장 23절에서 천사가 요셉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릴 때에도 이 예언을 언급합니다. 

교회의 성가 작사가들은 성서에서 영감을 얻어 가사를 지었는데 임마누엘과 관련된 훌륭한 가사를 썼습니다. 그중에 하나를 소개합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사야 예언자여, 기뻐하소서. 그 아들은 임마누엘 신인의 강림이니 해 뜨는 동녘 땅이 그 이름 받네. 아기와 동정녀께 찬미드리나이다."(결혼성사에서 발췌, 각종 예식서 178쪽) 

또한 임마누엘 이름이 적힌 주님의 성화를 비잔틴 성당의 벽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주 읽었거나 들었던 임마누엘이 과연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은 이 이름의 뜻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께 불순종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연결이 끊어져 버린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다시 연결하려 하느님의 아들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던 사건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환영을 보고 예언했습니다. 사람들이 인성을 취하신 하느님을 보게 되면 그래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함께 살면 사람들은 그를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난 후에 처음으로 사람들은 하느님의 음성만 들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야기하고, 눈으로 보고, 토마 사도는 심지어 하느님을 만져보기도 했습니다.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창조주 하느님과 헤어졌던 길고도 길었던 오랜 세월의 슬픔이 끝났습니다. 이제 영원한 삶과 기쁨 그리고 죽지 않는 천국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런 일련의 사건을 이성만으로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다고 성가 작가는 말합니다. "나는 보노라. 기이하고 영광된 신비를 동굴은 하늘 헤루빔의 옥좌는 동정녀, 구유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가 누우신 자리, 그분을 선양하고 찬양하나이다."(성탄 까타바시아 제 9오디 중에서) 

사람들은 주님께서 이렇게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임마누엘은 아기 시절 때 헤로데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될 뻔한 위험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집트에서 피난 생활을 경험했고 마침내 인간을 죄의 속박에서 해방하여 하늘로 올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끔찍한 고난을 겪으시고 견뎠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 자신께서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복음 15,13)는 말씀을 실천하셨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시점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임마누엘께서 보여주신 그토록 많은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와 소통하시기를 원하는 그분의 열망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기도하거나 교회에 가는 것이 그리스도께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의무를 했으니 이제는 하느님도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셔야 한다고 대가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 잘못되면 하느님께 불평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으시며,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으시며, 누구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분이 아님을 종종 잊어버립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 1서 4,8) 모든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유익함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절실하게 무엇인가 필요할 때마다, 유익한 것을 받기 위해서 '선한 것들의 보화'이신 임마누엘과 소통을 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요한복음 15,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한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주 만나고 싶어 하거나 대화하면서 너무 행복하여 떠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런 감정이 우리가 임마누엘과 맺는 사랑의 관계에서 느끼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말했듯이 마음 안에 신성한 사랑을 가진 사람은 끊임없이 주님을 따르는 것에 지치지 않습니다.(예레미야 17,16 참조) 

그리고 성 막시모스 고백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항상 마음에 날개를 달아줍니다."(400 장, 사랑에 관해서 D '40) 그래서 사람은 하느님과의 친교를 통해 끊임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들이 우리를 외면한다고 해도 임마누엘과 친교 하는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도 않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요한1서 4,18) 

모든 좋은 것을 누리도록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나의 모든 고통을 그분의 사랑에 맡깁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있으면 나는 모든 노력을 다하지만 동시에 그분의 도움을 구합니다. 모든 일에 그분의 축복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복음 1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하느님과 끊임없는 친교를 위해 우리 마음을 열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주셨으며, 지금도 끊임없이 보여주시는 사랑의 크기에 감동합시다. 그리고 임마누엘 하느님과 원할한 교제를 우리가 삶에서 분명히 할 때, 우리는 이곳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