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니콜라스 일본의 대주교 (2월 3일)
일본의 사도인 성 니콜라스는 1836년 스몰렌스크 지방의 한 마을인 예고로브카에서 태어났다. 본래의 이름이 이반 디미뜨리에비치 카사트킨이었던 성인은 그 마을의 매우 경건한 보제 요한 카사트킨 부부의 자녀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인이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성인의 어릴 적 꿈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지만 이후 자라면서 성인은 먼 곳에 선교사로 가기를 희망하였다. 처음에는 중국을 생각했으나 이후 신비스러우면서도 폐쇄적인 일본에 대해 알고 난 뒤 그곳에 가기로 결심하였다.
1860년 성 피터스버그(St. Petersburg) 신학대학의 사학년에 재학 중이던 성인은 일본의 하코다테(Hakodate)에 있는 러시아 영사관에서 근무할 신부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성인은 곧 이것이 자신을 부르는 하느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후 학업을 마치는 대로 니콜라스라는 이름을 받아 수도서원을 한 성인은 바로 보제에 이어 사제 서품을 받은 뒤 동아시아지역으로 떠났다.
생활방식이 그리스도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더구나 복음을 전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던 당시의 일본은 정교회 선교를 하기에는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그 무렵 일본인들은 외국인을 야수(野獸)로, 그리스도교는 악한이나 마법사들이 소속된 상스러운 집단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인은 이후 팔 년 동안 일본말과 일본의 문화, 관습, 일본 사람들의 생활방식 등을 배우는 데 전념하였다. 관청의 끊임없는 감시와 위협을 받으면서도 노력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성인은 신도(神道)의 제사장 사와베와 일본인 의사 사카야를 정교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후 약 열다섯 명의 일본인들로 정교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이때 성인은 개종자의 수를 많이 늘리려고 애쓰기보다는 정교 신앙을 갖게 된 이들이 진정하고 확고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성인이 선교 활동을 시작한 지 12년이 되는 1873년에서야 일본 정부로부터 정교회 선교에 대한 공식적인 허가가 내려지게 되었다. 그 해에 선교센터를 제국의 새로운 수도인 도쿄로 옮기고 나서 성인은 더욱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그로써 신도의 수는 곧 천 명에 이르게 된다. 이 년 뒤 1875년에는 첫 일본인 사제가 배출되었고 1878년까지 일본에는 4천여 명의 정교인과 많은 정교 공동체(community)들이 생겨났다. 이토록 짧은 기간 안에 이런 놀라운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말로 진행되는 성찬예배와 교육, 그리고 신앙적이고 도덕적인 서적의 출판에 힘입은 바 크다.
1880년 3월에 성인은 일본의 첫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후 성인은 물질적인 어려움을 무릅쓰고 도쿄에 그리스도 부활 대성당을 완공하였고, 여러 예식서들을 번역하는 한편 일본어로 된 정교 신학 사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또한 성인은 세례 예비자들과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를 세웠고, 일본인 성직자의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열기도 했다. 비록 성인은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함께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과 예배 관습 등을 일본에 전해 주긴 하였지만, 일본어를 쓰면서 일본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채 성장해 가는 진정한 일본 정교회가 세워지도록 힘썼다.
1905년 러일전쟁의 와중에서도 성인은 사랑하는 조국과 그리스도 안의 한 형제인 일본민족의 앞날을 위해 고뇌에 찬 기도를 드렸다. 이 고난의 시기에 성인은 대주교의 직을 부여받게 된다. 성인이 일본 땅을 밟은 지 어언 반세기가 된 1911년 일본에는 한 분의 대주교와 또 한 분의 주교 그리고 사제 35명, 보제 6명, 성가 지도자 14명, 교리교사 116명, 260여 개의 정교 공동체에 속한 3만 3천여 명의 신도들이 있게 되었다.
1912년 2월 3일 76세의 나이로 성인은 평화로이 안식하였고, 1970년 성인에 대한 공경이 정식으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