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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신앙/오늘의 축일

[2월 6일] 성 포티오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Ὁ Ἅγιος Φώτιος ὁ Ἰσαπόστολος καὶ Ὁμολογητὴς Πατριάρχης Κωνσταντινουπόλεως

 

성 포티오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2월 6일)


성인은 810년 콘스탄티노플의 명문가(名門家) 중 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인의 아버지 세르기오스는 성 타라시오스(2월 25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 형제 사이였고, 어머니 이리니의 남자 형제는 테오도라 황후의 여자 형제와 결혼한 사이였다. 성인의 부모님들은 수도자들을 존경하고 따랐는데, 안타깝게도 성화(聖畵 icon)에 대한 박해가 한창이던 때 순교하셨다. 그리고 당신들이 사랑하는 아들에게는 부(富)나 높은 지위보다도 더 귀한 유산, 곧 죽음 앞에서도 변치 않는 참된 믿음에 대한 사랑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성인은 교회와 세속적인 영역 모두에서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성인은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였고, 이로써 성인이 통달하지 못한 분야가 없었다. 또한 당대(當代)에 학문의 폭과 깊이에서 성인을 능가할 만한 이가 없었으며 성상 파괴(iconoclasm)의 소용돌이 뒤에 이어진 비잔티움의 지성적 부흥기에 중심적 인물이 되었다. 성인은 마그노라(Magnaura)궁 안에 세워진 제국 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신학 등을 가르쳤다.

 

857년 미하일 3세 황제의 삼촌인 바르다스(Bardas)가 권력을 잡고는 시이저(Caesar)라는 칭호를 붙였다. 그는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를 비난한 성 이그나티오스 총대주교(10월 23일)의 사임을 강요하면서 지혜롭고 경건한 포티오스 성인을 그의 후계자로 선출하도록 성직자들을 압박하였다. 성인은 완강하게 자신이 총대주교에 선출되는 것에 반대하였으나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한 신자에서 단 육일만에 모든 성직(보제, 사제, 주교)에 대한 서품을 두루 거친 성인은 858년 12월 25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직에 올랐다. 

 

매우 이례적(異例的)으로 최고의 성직에 오른 성인은 전(前) 총대주교를 열렬히 지지하는 이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사랑으로 교회를 이끌면서 일치와 평화를 재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였다. 성인은 교회 안에 남아있는 마니교(摩尼敎)와 성상 파괴 이단들에 맞서 굳건한 행동을 보였으며, 성상파괴 주의자들로 말미암아 파괴된 성당과 수도원 그리고 자선기관들을 다시 복구하는 일에 힘썼다. 그리고 야만족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업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성 이그나티오스의 지지자들을 달래려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성인은 폭력적인 방법을 쓰려는 정부의 시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859년 공의회(Council)를 열어 성 이그나티오스의 총대주교직 해제를 확정하고 그를 미띨리니로 그리고 나중에는 다시 테레빈투스로 추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에 대해 적대적인 선동(煽動) 행위가 그치지 않자 861년 ‘제1차-2차’(First-Second)로 알려진 공의회가 소집되어 정교성(Orthodoxy)의 회복을 승인하고 성상 파괴주의(iconoclasm)에 대한 분명한 단죄를 공포하였다. 또한 포티오스 성인의 총대주교직 임명이 정당함을 인정하였다.

 

한편 이그나티오스 성인을 지지했던 당시의 오만하고 야심에 찬 로마 교황 니콜라스 1세(858-868 재위)는 861년의 공의회를 기회로 삼아 권위주의적인 교황 제도의 확립을 바라면서  전체 교회에 대한 수위권(首位權 supremacy)을 행사하려고 하였다. 비잔티움 교회의 내부 문제에 대한 교황의 간섭에 직면하게 된 포티오스 성인은 로마교회의 생소하고 전에 없던 관습들(이를테면 성직자의 독신제도, 토요일의 금식, 성찬예배에서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쓰는 것 등)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성인의 대응에 화가 난 교황은 동방의 모든 주교들에게 편지를 써서 포티오스 성인이 다른 사람의 (총대주교) 지위를 불법적으로 차지했다고 고발하면서 성인의 총대주교직을 박탈한다고 공포하였다. 또한 교황은 ‘제1차-2차’ 공의회의 결정은 무효라고 천명하였다. 더 나아가 교황은 서방교회의 주교들로 이루어진 공의회를 로마에서 소집하여 포티오스 성인의 총대주교직 박탈을 선포하고 성인에게서 서품을 받은 모든 성직자들을 파문하였다. 그리고 미하일 3세 황제가 이 같은 일련의 과정들에 대해 반대하자 865년 교황은 전체 교회에 대한 자신의 수위권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고 통지하였다. 그러고 나서 뒤이은 편지들을 통해 교황은 포티오스 성인이 온갖 모욕을 당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들에 대해 성인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성인은 황제의 지원에 힘입어 슬라브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860년 성인은 학식이 높은 친구이자 동료인 콘스탄티노스(우리가 지금 성 끼릴로스로 공경하는 분, 5월 11일)와 그의 형제 메토디오스(올림푸스산에서 온 수도자)로 하여금 남(南) 러시아의 카자르(Khazars)로 예비적인 선교활동을 떠나도록 한다. 이후 삼 년 뒤 모라비아(Moravia) 군주의 요청에 응하여 성인은 발칸반도에 있는 슬라브 민족의 개종을 불러일으킨 위대한 선교활동에 두 형제를 보내게 되었다.

 

867년 말 미하일 3세 황제가 암살되고 바실리오스 1세(마케도니아 왕조의 창시자)가 황제가 되었다. 황제는 즉시 포티오스 성인의 직위를 박탈하고 수도원 감옥에 가둔 다음 이그나티오스 성인을 다시 복직시켰다. 이그나티오스 성인의 평화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포티오스 성인의 반대자들은 성인이 서품한 모든 성직자들을 다시금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특별히 라틴(서방) 교회의 ‘필리오케’(Filioque) 교리(성령이 성자로부터도 나온다는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 정교회는 이 교리가 니케아 [신앙의] 신조에 어긋나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봄.)의 오류와 이 교리를 덧붙인 니콜라스 교황을 정죄하고 모든 이단에 대한 정교 교리의 승리를 선포한 867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 두(동방과 서방) 교회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전임 니콜라스 교황의 승계자인 하드리안 2세 교황은 869년 공의회를 소집하여 포티오스 성인을 다시금 정죄하고, 867년의 공의회가 무효임을 선언하면서 공개적으로 공의회의 법령집(Acts)을 불태웠다. 라틴인들이 ‘제8차 세계 공의회’라고 부르는 잘못된 공의회(870년)에 참석한 적은 수의 주교들은 황제의 권위에 압도당한 채 포티오스 성인을 정죄하고, 성인의 지지자들을 제국의 국경지대로 추방하였다. 200명 이상의 주교들이 주교직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많은 사제들은 성직마저 박탈당했다. 

 

죄인처럼 주교회의에 불려 나온 성인은 자신에 대한 고발에 대해 답변할 것을 요청받자, ‘하느님께서는 침묵하는 자의 소리를 들으신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침묵을 지킴으로써 단죄 받음을 피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계속해서 심문하는 자들이 대답을 강요하자 성인은 ‘나의 정당성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성인은 질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과 사람과의 모든 만남을 박탈당한 채 삼 년 동안 불평 한 마디 없이 혹독한 감옥생활을 견뎌야 했다. 무고한 이그나티오스 성인에게 아무런 책임도 지우지 않은 채, 성인은 도리어 고통받는 동료들에게 편지를 통해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황제와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러는 동안 자신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깨닫게 된 주교들은 황제에게 간청하여 870년 공의회의 결정들이 무효임을 공포토록 하고 포티오스 성인 또한 풀려나도록 하였다. 성인은 최고의 예우를 받으면서 궁정으로 안내되었고, 바실리오스 1세 황제는 성인을 자기 자녀들의 교사로 임명하였다. 포티오스 성인은 즉시 이그나티오스 성인과 화해하였다. 경쟁관계에 있는 두 당파의 희생양이었던 두 성인은 서로를 따뜻이 얼싸안았고, 성인은 날마다 이그나티오스 성인을 방문함으로써 노쇠한 총대주교(성 이그나티오스)의 전폭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877년 10월 23일 이그나티오스 성인이 안식하시자 교회는 만장일치로 포티오스 성인을 다시금 총대주교직에 선출하였다. 879-880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는 383명의 교부들과 교황의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포티오스 성인의 주재로 공의회가 열렸다. 이 공의회에서 포티오스 성인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졌고, 870년 공의회의 무효화가 이루어졌으며, 특별히 신앙의 신조에 첨가된 이단적인 교리를 포함한 모든 새로운 고안물(考案物 innovation)이 정죄된 가운데 두 교회(동방과 서방) 간의 친교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레오 6세(886-912 재위)는 아버지 바실리오스 1세를 이어 등극하자마자, 자신이 아버지에 대하여 꾸민 음모와 관련해서 성인의 간접적인 책임을 물어 곧바로 성인을 총대주교직에서 파면하였다. 그리고 성인은 죄인으로서 아르메니아 수도원에 감금된 채 오 년을 지내야 했다. 이때 책 한 권 없는 자신의 방에서 성인은 ‘성령의 신비로운 발현’에 관한 글(Mystagogy of the Holy Spirit, 필리오케[Filioque] 이단에 대한 조직적인 반박문)을 쓴다. 다가올 충돌을 예상하여 이 논문을 거룩한 교회에 대한 자신의 증언으로서 남긴 채 성인은 893년 2월 6일 평화로이 안식하였다. 곧바로 성인의 무덤에서 일어난 많은 기적들로 말미암아 성인의 오랜 적들조차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