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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영성/말씀과 함께

두려움과 두려움의 극복

 

두려움과 두려움의 극복

소티리오스 대주교


오늘 우리 교회는 향료를 가진 여인들과 함께 요셉과 니코데모에게 함께 공경을 표합니다. 이들은 돌아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 지극한 존경심을 지니고 예수님을 무덤에 장례 지내기 위해 정성을 다했던 사람들입니다. 

요셉은 유다의 아리마태아 출신이었고, 의회 의원이었습니다 (마르코 15:43) 루가 복음사도는 그를 올바르고 덕망이 높은 사람이라고 특징지었으며(루가 23:50), 마태오 복음사도는 그가 부자였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마태오 27:57) 그러나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숨기기도 했습니다 (요한 19:39)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돌아가신 후에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무덤에 묻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할 만큼 놀라운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르코 15:43참조)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장례지내는 이 거룩한 일에서 요셉을 도왔는데, 그도 역시 의회 의원이었습니다.(요한 7:50) 니고데모는 바리사이파였고 유다인들의 지도자였고 (요한 3:1), 이스라엘의 선생이었고 (요한 3:10) 그리고 영향력 있는 부자였습니다. 예전에 그는 의회에서 예수를 죄인으로 단죄하고 싶었던 의원들 앞에서 예수님을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요한 7:50-52) 요한 복음 사도는 니고데모가 어느 날 밤에 예수님과 몰래 만나 세례를 통한 영적 재생의 필요성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의 숨겨진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는 요셉과 함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였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바르고 예수님을 무덤에 장례지내는 것을 도왔습니다.

주님이 활동하신 시대뿐 아니라 사도들이 살던 시대에도 유다 지도자들에 대한 두려움은 대단했습니다. 예수님의 숨겨진 제자들로 있었던 유다인 지도자들 중에는 요셉과 니고데모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한 복음사도는 “유다 지도자들 중에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바라사이파 사람들이 두려워서 예수 믿는다는 말을 드러내 놓고 하지는 못하였다. 회당에서 쫓겨날까 겁이 났던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보다도 인간이 주는 영광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요한 12:42-43)라고 말합니다. 또한 일반인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유다인들이 두려워서 예수에 관하여 내놓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는 현상은 여러 형태로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경에 있는 영원한 진리를 녹슨 관념이라고 하고 복음경의 영원한 진리와 반대되는 새로운 신념을 가지고 진보인 척하기를 원하는 환경에서 그리스도인이 살게 된다면 그는 위축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그것을 표현할 용기를 가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그를 “퇴보하는 사람”이라든가 “구식”이라든가 하는 말로 규정할까 봐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교적이고 윤리적인 삶의 기준에 대하여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바보”가 아니냐고 하면서 배척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합니다. 이런 비웃음은 그리스도인들을 좌절시킬 것입니다. 그들은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사는 대로 그들의 삶을 모방해서 즐기면서, 똑같이 처신하면서, 그리고 도덕적인 제어관념없이 살게 되어, 결국에는 자신의 삶을 망치게 될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그들도 그것이 그리스도 교인으로서 지켜야 계명들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신의 양심에 귀 기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심의 소리는 다음과 같이 ‘요즘은 옛날처럼 살지 않고 이렇게 모두 산다’라고 숨이 막힐 정도로 우리 자신을 압박해 오는 것들에 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는 예외 없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르면서 살게 됩니다. 지금은 새 시대!이고 새로운 문화!의 시대이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세대가 살았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현상들을 겪으면서 그리스도 교인들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명들을 배척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도록 애쓰게 되고, 마침내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바울로 사도는 우리에게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로마서 12:2)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빛을 밝혀주시면, 사람들의 눈은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진보라든가 현대화라든가 하는 새로운 이념이라고 간주되는 것들이 결코 올바른 삶의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보여주시기 이전에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 당시에 이미 소위 현대인이었던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던 것들은 바울로 사도가 살던 때에도 많았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로마서 1장 21-32절에서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교 그리스도인들은 진보를 빙자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인간을 퇴행시키는 것들에 대해 가만있지 맙시다. 외국으로부터 정보를 전해준다고 활동하는 유명한 기관들에서 복음경의 원칙을 어기며 행하고 있는 거짓 선전의 희생양이 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것들 때문에 우리가 처해질 상황이 어떨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만족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교인은 자신의 사회 환경을 두려워해서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근본을 거부하지 말고, 오히려 반대로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에서 자신의 말과 삶의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존재감을 보여주며 살아갑시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방향감각을 잃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빛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에 퍼지고 있는 도덕적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세상의 소금” (마태오 5:13)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짠 맛을 계속 잃어가고 있는 비극적 붕괴 상태로부터 우리 사회를 보호할 수 없다면 그것은 가슴 아픈 일이 될 것입니다. 

 

소아시아와 유럽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맨 처음 선포한 사도 바울로가 용감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은 우리에게 비겁한 마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사려를 주십니다.”(2디모테오1,7 참조)라고.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왜냐하면 내가 세상을 이겼기 때문이다.” (요한 16:33 참조)라는 복음의 목소리가 우리 영혼의 귀에 메아리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