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릴 수 있는 일과 어울릴 수 없는 일
나는 매주일과 대축일마다 교회에 가서 초를 켜고 성호를 그으며 예배를 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계속합니까. 아니면 교회에서 나서면서 다 잊어버리고 맙니까? 교회에서 돌아와 가계를 열고 손님을 적당히 속여 먹지는 않습니까? 또는 집에 모여 앉아서 하느님과 교회를 잊어버린 채 남의 험담이나 하고 비방과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짓이나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과 마귀는 본질적으로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데도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울려서는 안 되는 일에 어울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어울려서는 안 되는 일에 어울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서와 교회는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저 유명한 산상설교에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제기됩니다. 하느님과 부자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사이인가? 그래서 부자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주님 자신이 마태오 19,16~26에서 대답을 내려 주십니다. 부자 청년은 주님께서 나를 따르려면 재물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풀이 죽어 주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큰 부자로서 재산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 가능하다"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어렵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는 부자의 자리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부자라도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신이 재물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이라는 인식으로 재물을 잘 관리한다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의미해 줍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은 대표적인 예로서 구약시대의 아브람이나 신약시대의 자캐오에게는 낙원이 열려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복음은 가난한 자만을 위하고 부자를 적대시한다고 할 수는 없으며 천국은 가난한 자들에게만 제한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에 대해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전 10,21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잔을 마시는 여러분이 마귀들의 잔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또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여러분이 마귀들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하느님과도 잘 지내고 마귀와도 잘 지낼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셨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상인이 복음의 가르침은 접어두고 손님을 적당히 속이고 부당한 이득을 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후 6,14~16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짝짓지 마십시오...... 정의와 불의가 어떻게 짝이 될 수 있으며 빛이 어떻게 어둠과 사귈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어떻게 벨리아르와 마음을 합할 수 있으며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무엇을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성전에 우상이 어떻게 어울리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그의 둘째 편지 1,10~11에서 "만일 누가 여러분을 찾아가서 이 교훈과 다른 것을 전하거든 그를 집안으로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마십시오."하고 당부합니다.
믿는 사람은 이렇게 어울려서 되는 일과 어울려서는 안 되는 일을 구분하면서 하느님의 명령을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