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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영성/말씀과 함께

관용 (1)

 

 

관용 (1)

(소티리오스 대주교)


우리 교회에서 드리는 9시과 중 한 성가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 다음과 같이 간청합니다.

“주여, 당신은 우리 모두에게 관대하시니 당신의 나라에서 나를 기억하소서.”

이 짧은 말에는 참으로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당신의 크신 관용을 보여주신 많은 사건들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주님께서 지상에 사시는 동안 당신의 원수들에게 보여주신 관용은 언급한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열두 제자에 대한 주님의 놀라운 관용이 드러났던 두세 가지 슬픈 사건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자,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삼 년 동안 밤낮없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가르치고 계시고, 제자들은 당신의 전례 없는 기적을 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을 보이고 있습니다!(마태복음 8,26 참조)

또한 예수님이 잡혀가신 후, 제자들은 체포될까 두려워 주님을 저버리고 떠나 숨어버립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행동에 대해 그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보다 더 참담하고 슬픈 것이 또 있겠습니까?

제자들 중 첫째가는 베드로는 마지막 날 밤에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가도 좋고 죽어도 좋습니다.”(루가 22,33) 그러고서는 다음날 아침, 어느 여종 앞에서, “나는 그런 사람을 모르오.”(루가 22,57)라고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가 당신을 부인한 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주님은 베드로의 이 행동에 대해 어떤 책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베드로를 회개로 인도하기 위해 의미심장한 눈길을 한 번 주셨을 뿐입니다.(61절 참고) 그리고 나중에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고, 그에 대한 대답을 통해 베드로가 다시 사도직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요한 21,15~18 참조)

 

이것만으로도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보여주신, 무엇보다 가장 가까이서 그를 모시던 제자들이 당신께 보인 무례한 행동에 대해 보여주신 크나큰 관용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을 보여주시며 주님은 우리도 당신을 닮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 사도 바울로께서 우리에게 권고하는 사항입니다.

“서로 도와주고 피차에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골로사이 3,13)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에서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하려면 관용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 놓치는 부분은 관용을 우리 삶에서 실천하는 문제입니다. 주로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우리는 누군가 우리를 귀찮게 하거나 괴롭히거나 억울하게 (부당하게) 대하면, 그 사람이 우리의 형제, 자매, 아버지, 어머니, 배우자, 친구처럼 아주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유대감이나 사랑을 망각한 채, 거세게 반응하고 맙니다. 그 반응이란 때때로는 미미할 때도 있지만, 팽팽한 갈등을 유발하는 경우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속에선 곧 복수할 기회를 엿보기 시작합니다! 이기심이 발동하여, "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나를 바보로 아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계속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라지!", "다시는 그 사람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아"와 같은 생각이 지배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작은 오해에서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어떤 말이나 행동을 잘못 이해하고, 우리의 불완전한 추론이 이를 잘못 재구성하여, 상대방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가 유발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속에 폭풍우가 휘몰아쳐서 몇 날 며칠 잠도 못 자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웁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 겪는 혼란과 근심으로 인해 심장마비와 뇌졸중에까지도 이르렀습니다.

이 모든 불쾌하고,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 오직 관용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많은 경우에 있어, 사람들끼리는 어떤 한 가지 문제에 대해 서로 전혀 다른 견해, 다른 열망, 다른 취향, 다른 이데올로기, 다른 반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맙시다. 여기에 우리 각자의 자존심, 완고함, 심지어 형제들 사이에서도 드러나는 성격적 차이나 특성을 추가하면 사람들 사이의 빈번한 마찰은 우리 삶에서 결코 빠지지 않을 것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타인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양자 간의 대화를 통해서든 제삼자의 도움을 통해서든, 풀고 화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은 어떤 설명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견해만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를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우리의 관용입니다.

 

지혜로운 이들이 말했듯, 관용은 기계의 "윤활유"와 같이, 사회가 유지되고 관리되고 적절하게 기능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자동차 엔진이든, 동력을 발생시키는 다른 어떤 기계이든, 적절한 윤활제가 없으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쓸모가 없게 됩니다. 

관용은 오해, 냉담 및 경쟁심을 해소하고 우리 관계에서 화합과 마음의 평화가 우세하도록 훌륭한 조건을 만드는 유일한 요소입니다.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관용을 보이면 상대방은 내가 그의 부당한 행동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 않을까?"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불의는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관용이란 바로 이런 경우에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가한 피해는 용납될 수 없고 비판받아야 할 일이지만, 우리에게 그 일을 가한 형제를 우리는 사랑으로써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신 우리 주님, 우리 하느님께 우리는 순종하게 됩니다. 다른 모든 것은 그저 하느님께 맡기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적절히 손을 쓰시고 기회를 만드셔서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관용에 관한 주제는 여러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하기에, 다음 설교 시간에 이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