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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영성/말씀과 함께

회개로 시작합니다

 

회개로 시작합니다

소티리오스 대주교


우리가 이번에 시작한 설교 시리즈의 일반적 목표는, 정교인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에 도달할 수 있을지를 성경과 교부들에 기초하여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기초는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가파르나움에서 전도를 시작하시며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오 4: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만난 두 제자에게,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소식이 전파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가 24:47 참조)

 

그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로도 감옥에 갇혔을 때 아그리파 왕에게 해명하면서 전도의 핵심은 회개라고 강조합니다. “나는 온 지방 사람들과 이방인들에게,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서 회개한 증거를 행실로 보이라고 가르쳤습니다.”(사도행전 26:20 참조). 또 모든 사도들과 교부들도 회개를 전도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직접 회개를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한 조건으로 정의하셨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것을 지속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회개란, 우리가 하느님을 ‘따른 모습’에서,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아담은 전능하신 하느님에 의해, 그분의 모습을 따르고 닮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따른 모습은 그가 창조되었을 때 곧바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은, 아담 스스로가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을 받아 자유롭고 자발적인 마음으로 계발해 나가야만 했습니다. 하느님을 닮는다는 것은, 거룩해지는 것, 성령의 은총을 얻는 것, 영적으로 충만해지는 것, 그리고 신화(神化)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항상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아담은 순결했고, 밝았고, 소박하고 단순했으며, 겸손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이 아름다운 관계는 깨지고 말았습니다. 아담의 마음은 어두워지고, 흐려지고, 변색되었습니다. 불순한 마음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요한 클리마코스 성인에 따르면 “회개는 마치 제2의 세례와도 같습니다." 그리스어로 회개를 뜻하는 “메따니아”라는 단어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어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교인이 아닌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뉘우침’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의 뜻을 보면, 누군가 잘못된 행동을 하여 슬픔을 느끼기는 하지만, 잘못을 바로잡고 앞으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관련된 예로, 신약성서에서 “유다는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자기가 저지른 일을 뉘우쳤다.”(마태오 27:3)라고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죄를 지어서 걱정스럽긴 하지만, 이에 대해 회개는 하지 않은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 곁에서 3년 동안 지내면서, 많은 죄인들이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 또 예수님께서 그들을 모두 용서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율법에 의해 사형이 선고된 간음 사건들도 보았습니다. 만일 유다가 정말로 회개하고 예수님께 용서를 구했다면, 자애로우신 주님께서는 분명 그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도 용서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렇게, 누군가 잘못이나 죄로 인해 걱정과 괴로움을 느끼면, 양심의 가책이 그를 괴롭히고,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의 죄는 계속해서 그를 짓누르고, 죄책감을 느끼게 할 뿐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회개의 성사’라고도 불리는 고백성사 때 가끔 일어나는 일에 대해 언급해 보겠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사제가 성찬예배 전 프로스코미디 의식을 준비하고 있는 아침 시간에 사제를 찾아와서 고백성사를 하려고 합니다. 곧 있을 성찬예배에서 성체성혈을 받기 전에 죄를 고백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적 제한이 있는 이 순간에 어떻게 영적 사제에게 마음을 열고 깊은 회개의 마음으로 고백을 하며, 영적 아버지의 영적인 인도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남들이 이렇게 한다는 이유로 나 또한 진실한 회개 없이 형식적으로 고백성사를 하면, 아무런 유익함이 없고 영적인 발전도 없습니다. 고백성사는, 영적 아버지가 정해주는 시간에 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때가 힘들다면, 영적 아버지와 상의하여 다른 시간에 약속을 잡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회개는, 일부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인간의 영혼에 천천히, 조용히 자리 잡으며 발전합니다. 하느님의 은총 아래서, 충분한 시간과 수고와 연습과 투쟁이 필요합니다. 밭에 씨앗을 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열매가 맺히고 수확을 거둘 때까지 몇 달이나 걸립니다. 회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이 새로운 상태가 되기 위해선, 그저 한 순간만의 결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관심과 투쟁이 필요합니다.

 

회개가 진실된 것이기 위해선, 실천적인 회개여야 합니다. 에톨로스의 코즈마스 성인은 “모든 영적 사제들, 총대주교들, 대사제들과 온 세상이 당신을 용서해도, 당신이 실제로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받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죄에서 멀어지고 삶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이는 회개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우리 영혼에 조금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회개는 하느님의 은총이 하시는 일입니다. 죄의 암흑 속에 살면서 거룩한 삶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인간은, 인간적인 삶과,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의 차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신성한 은총이 그의 마음에 신성한 사랑의 빛을 쏟아부을 때만, 자신이 얼마나 영적으로 빈곤한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하느님께 “저에게 완전한 회개를 주소서.”라고 그토록 열렬하게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이 참된 회개야말로 하느님 나라로 갈 수 있는 안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특히 회개와 고백의 성사를 통하여, 신자들의 영혼 속에 지속적인 회개가 자라나도록 끊임없이 돌보고 계십니다. 그것은, 신자들의 영적 삶과 구원이, 바로 회개 위에 구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