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부정이고 배반이다
암브로시오스 조성암 대주교
마태오 제1주일 – 모든 성인들의 주일 (마태오 10,32-33; 37-38; 19,27-30)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는 ‘모든 성인들의 축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모든 성인들을 기념하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이유에서 입니다.
첫 번째는, 거룩함이 바로 성령의 열매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순절 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협조자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실”(요한 14:16)것이라 말씀하시며, 우리의 거룩함을 위해 일하시는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오순절 다음 주일에, 성령의 거룩한 일의 결과인 모든 성인들을 기념하는 주일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구약시대부터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성인들의 무리’에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린 모든 성인들의 이름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하느님만은 이미 “생명에 책”(필립보 4:3)에 기록되어 있는 이 모든 이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세 번째는, 성인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이들은 여러 가지 변명을 들면서, “거룩한 사람”(데살로니카 전 4:3)이 되는 길인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합니다. “오늘 축일로 맞는 이 성인이 저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저는 고행자가 되어 광야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 연약한 무리에 속한 어린아이와도 같은데, 어떻게 그러한 성인들의 업적을 본받아 쫓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변명에 대해서 교회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당신이 어떠한 사회 조직에 속해있든,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있든, 어떠한 학식을 가졌든, 어떠한 연령층이든, 오늘 맞이하는 모든 성인들의 주일에는 당신의 처지와 상황에 맞는 성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바로 그 성인을 본받아 그분의 발자취를 쫓아가십시오.”
오늘 이 축일에, 모든 성인들은, 즉 예언자들, 의인들, 순교자들, 고백자들, 수도자들, 고행자들, 선교사들 등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성인들은 우리보다 앞서 행진하며, 자신들을 본받아 살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인들의 성화를 보면서, 그들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배우면서, 우리도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게 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방법이 바로 하늘나라로 가는 올바른 이정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고린토 전 11:1)라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이렇듯 우리는 앞이 안 보이는 사람처럼 헤매면서 걷지 말고, 또 즉흥적인 방법을 택할 게 아니라 우리보다 먼저 구원을 찾은 성인들의 올바른 길을 본받아 따라가야겠습니다. 이러한 성인들의 인도를 받으면 우리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로마서 12:2) 더 잘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모든 성인들은 각자 다른 시대 속에서, 다른 개성과 생활방식을 따라서 살아왔지만, 우리가 어떤 시대나 사회에 속해있든 상관없이, 그분들을 본받을 수 있는 공통된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복음 말씀에 대한 증언’입니다. 모든 성인들은 그냥 단순히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갖고 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자신들의 행동과 말을 통해서 이를 증언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것은 우리 주변의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다른 어떤 물질보다도 그리스도를 더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마태오 복음을 통해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오 10:37) 물론 우리는 모든 사람들, 우리 주변의 가족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어떤 사람이나 물질보다 더 먼저 그리스도를 사랑하려는 준비가 안 된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오 20:29)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행동과 말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총에 대해 증언하고 희생하면,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보답을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증언하지 않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에서는 성찬예배가 거행되는데, 쉬는 날이라는 이유로 늦잠을 잔다거나, 어딘가 놀러 가기를 더 우선적으로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경우로,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본다는 이유로 기도하기를 주저하고 창피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창피함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신 음식을 감사히 여기며 주님께 축복을 요청하는 기도를 꺼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구복단을 통해 하신 말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마태오 5:11)를 잊어버린 채, 놀림이나 따돌림을 당할까 두려워서 가족에게, 친구에게 그리고 동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보내며 겪은 많은 일들을 떠올려 보면 안타깝게도 그리스도를 증언한 것은 없고, 그리스도를 부정한 것이 넘쳐날 정도로 많다는 것이 드러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은 단순히 작은 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배반이고,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달리게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매번 “사람들 앞에서”(마태오 10:32) 그리스도를 증언할 용기가 없는 것은 유다처럼 그리스도를 팔아넘기는 것이고, 로마 군인들처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이러한 잘못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달리게 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부정하지 않기 위해 오히려 자기 자신들이 스스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리스도를 팔아넘기지 않기 위해 성인들은 기꺼이 순교를 당하고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많은 가르침을 초대교회 시절 때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이야기 중에서 한 가지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박해시대 때, 그리스도를 미워하던 사람들은, 어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무자비하게 괴롭히며 박해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박해자들의 계속되는 질문에도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입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증언하는 것’ 외에 다른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것에 화가 난 군인 한 사람이 그 사람의 혀를 칼로 잘라버렸습니다. 그 사람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손가락에 묻혀 땅에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쓰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보다는 죽음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는 목숨을 잃었지만, 천상의 나라에서 승리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고, 순교를 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이 사랑하는 신랑 그리스도를 만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리며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린 성인들을 본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성인이 가르쳐주신 대로, 그들의 삶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모두가 성인들처럼 투쟁을 하고, 고행을 하고,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하고, 순교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성인들의 공통된 특징인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은 우리가 닮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증언하실 수 있도록 우리도 항상, 어느 곳에서든지 행동과 말로써 그리스도를 증언합시다. 그래서 우리도 모든 성인들처럼 구원을 얻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