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부름에 따른 순종과 우리의 구원
암브로시오스 조성암 대주교
마태오 제2주일 (마태오 4,18-23)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말씀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주님과 첫 제자들이 만난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첫 만남은 아주 단순하고 간결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 만남은 또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사람의 사랑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만남의 목적은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사도들을 뽑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중대한 일을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지식인들이나 권력자들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배운 것이 없는 어부들에게 맡기기로 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바로 하느님의 지혜이고 권능이며, 스스로 지혜와 권능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의 지혜와 힘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 복음의 지혜와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꼭 해야 할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했던 중대하고 유일한 일은 바로 하느님의 부름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구원도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했는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첫 제자들이 뽑힌 이 사건은 주님의 ‘권위 있는 부름’과 제자들의 ‘일반적이지 않은 답변’으로 신속히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많은 절차나 토론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부름은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한마디뿐이었습니다. 이 거룩한 한 마디는 너무나 강하였기에 어떤 반론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답변은 어떤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름에 제자들은 어떤 말을 하지 않고 “곧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럼 어디로 갔던 것일까요? 전혀 모르는 사람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재산과, 가족들과, 직업과, 자신들이 익숙했던 습관과 체계를 모두 놓아두고, 믿음과 충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어떠한 망설임이나 의심이나 의문 없이 주님의 선교 사업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놓아두고 온 생애를 그리스도의 손에 믿고 맡겼던 것입니다.
갈릴래아의 이 네 명의 어부들이 했던 행동의 근본은 바로 ‘순종’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어린이가 어른에게 순종하고, 신자들이 교회에 순종하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순종을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인류의 비극은 최초의 인간이 하느님께 불순종하면서 시작되었고, 인류의 구원은 완전한 신이면서 완전한 인간이신 이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순종에 따른 행동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신으로서의 영광을 놓아두고, 오직 겸손으로써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 사도 바울로가 필립비 서신에서 쓰고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비 2:8) 불순종은 최초의 인간을 낙원에서 추방하였고, 그리스도의 순종은 사람들을 다시 하느님의 왕국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은총으로, 구원의 해방사업에 쓰이는 거룩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만약 사도들이 주님의 부름에 순종하지 않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냉정한 논리를 따랐다면 그들은 이렇게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갈릴래아의 좋은 어부나 한 가정의 좋은 가장으로 남았을 수는 있어도, 성령으로 빛나서 세상의 지혜로운 스승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름에 사도들이 순종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약 나도 그리스도께서 직접 부르신다면 따랐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에도, 그리고 언제나 항상, 모든 이들을 직접 부르고 계십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주님의 부름에 순종하도록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우리가 듣고 있는 복음 말씀이 곧, 주님 당신인 것입니다.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교회가 곧,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어렵게 하는 장애물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장애물은, 어떤 일을 곧바로 실행하지 않고 나중으로 미루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모습에 사람들은 감동받아 그분을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곧바로 실천하지 않고 나중으로 미룹니다. 사탄은 이렇게 ‘지체(미루기)’라는 계략을 써서, 사람이 구원을 위해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너에겐 앞으로도 시간이 있어”, “피곤하니까 오늘은 기도하지 말고 내일 해”, “하느님의 말씀은 다음 달부터 배워도 괜찮아”, “오늘은 교회에 가지 말고 다음 주에 가”, “도움이 필요한 이웃은 다음에 시간이 있을 때 도와줘.” 등의 말을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는 모든 것을 내일로, 나중으로 미루면서 결과적으로는 어떤 것도 시작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후서에서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고린토 후 6:2)라고 말하면서, 영적 투쟁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바로 오늘 시작하라고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장애물은 사랑하는 사람과 물질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부르셨을 때 사도들은 가족이나, 배나, 재산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갔고”(4:20), 야고보와 요한은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를 따라갔습니다.”(4:22)
세 번째 장애물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성향입니다. 많은 이들이 영적 수행을 하려고 하지만,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영적으로 수행하고 싶지만,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사실 이는 그 외의 다른 많은 것들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직업에 관련된 것들이나 경제적인 문제에 관련된 것들이나 인간관계로 인한 문제들을 다 정리하고 나면, 그때는 과연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될까요? 우리의 이런 걱정거리나 세상사들이 언젠가 완전히 정리되어서 우리가 자유롭게 그리스도를 따르게 될 때가 올까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언젠간 누군가 우리를 부를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어떤 반항도 없이 곧바로 그를 따라갈 것입니다. 그는 누구일까요? 바로 사탄입니다. 그때는 미처 정리하지 않은 일이 없어서, 그를 곧바로 따라갈는지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과 똑같은 상황일 테지만, 그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를 따라갈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쥐고 있는 커다란 주제는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매일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관계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외의 다른 것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저절로 정리가 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오늘도 그때의 갈릴래아 호숫가에서처럼 우리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충실한 제자가 되고, 당신의 계명을 실천하고, 당신의 거룩함을 닮으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지만 강제로 우리를 당신 곁에 두려고 하지는 않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의 결정이 즉흥적이거나 가벼운 것이 아니라, 성숙하고 굳건한 것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헌신과 순종의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 모습대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러면 무한한 축복과 영광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은총이 이제와 항상 또 영원히 우리에게 가득 내릴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