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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신앙/24인 수호성인

성 테오도라 아르타의 왕비 수녀 (3월 11일)

 

아름다운 왕비

성녀께서는 1210년 그리스의 데살로니끼에서 태어나셨다. 성녀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지역의 고명(高名)한 행정관이요 그리스도인이었다. 성녀의 어머니 엘레니는 딸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였으며, 성녀는 인물과 마음씨 모두가 아름다운 처녀로 자라났다. 그런데 1204년 프랑크족의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군인들은 성지(聖地)를 이슬람교도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분(名分) 아래 비잔틴 황제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면서 야만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이때 비잔티움의 황제와 귀족들은 그 도시를 떠나 소아시아의 폰도스(Pontus)와 니케아 그리고 펠로폰네소스와 이피로스(Epirus: 그리스의 서부지역) 등으로 흩어져서 통치하게 되었다. 1230년 이런 정세 속에서 당시 이피로스 지역을 다스리던 미하엘 2세 앙겔로스(1237-1271)는 성녀를 만나게 되었고, 이내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녀께서는 황후였음에도 화려한 파티를 열거나 금은보화 등으로 치장하는 생활을 피하고 백성들에게 자선과 사랑을 베푸는 일을 더욱 열심히 하였다.

고난과 인내의 세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성녀에게 큰 시련이 닥쳐왔다. 성녀의 남편이 한 귀족 출신의 과부에게 눈이 멀어 성녀를 미워하게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성녀는 임신한 몸으로 자신의 여동생과 함께 궁궐을 나와 5년 동안 이 곳 저 곳을 헤매며 살았다. 이런 속에서도 성녀는 흔히 보기 어려운 인내심을 지닌 채 남편인 황제를 미워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남편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산의 작은 동굴을 피난처로 삼아 아기 (니키포로스 왕자)를 낳아 기르고 나물을 뜯어먹으며 살았다. 성녀는 결코 누구를 원망하거나 저주하는 일이 없이 믿음으로 기도하였으며, 남편인 미하일 왕에 대한 사랑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배고픔에 지친 채 한 시골 사제에게 발견되었다.

다시 찾은 행복과 수도생활

성녀께서 궁전을 나간 5년 뒤 주님의 은총으로 황제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 자신의 아내(성녀)를 찾도록 하였으며, 성녀께서 궁궐이 있는 아르타(Arta)로 돌아오는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기쁨의 환성을 지르며 성녀를 칭송하였다. 그후 황제는 회개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였으며, 자신이 회개하였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성모님께 바치는 아름다운 성당 두 개를 아르타에 건립하였는 데 이 성당들은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성녀는 수녀가 되어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 옆에 세운 수녀원에서 수도생활을 하였으며, 경건한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 철야예배와 기도, 선행에 전념하는 생활을 하였다. 1281년에 평안히 안식하신 성녀의 시신은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 앞 쪽에 안장되었으며, 그곳으로부터 고칠 수 없는 병과 악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치유받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은 성 테오도라 성당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