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요셉 성가 작가(4월 3일)
출생과 수도생활
성인은 816년에 시실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성서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였던 성인은 827년에 아랍인들이 고향 마을을 점령하고 난 뒤 열다섯 살의 나이에 가족과 함께 펠로폰네소스로 이주하였고, 그 후 다시 데살로니끼로 옮겨갔다. 데살로니끼의 한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된 성인은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자고, 마른 빵과 물로 끼니를 대신하며, 낡아빠진 옷을 입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였다. 성인은 특별히 여러 사본들을 필사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고, 이로써 그 수도원이 아름답고 우아한 수사체(手寫體 : 손으로 베껴 쓴 글씨)로 명성을 얻는데 공헌하였다.
투쟁과 고난의 시기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성인은 수도원을 방문한 데카폴리스의 성 그레고리오스(11월 20일)를 만나 영적인 친교를 나누게 되었다. 그 후 그레고리오스 성인과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한 성당에 머무르던 성인은 성화를 공경하는 이들을 박해하는 무리에 맞서 참되고 바른 정교회의 신앙과 가르침을 지키는 일에 헌신한다. 그런데 후에 교황 그레고리 4세(827-844)에게 가서 성화에 대한 박해상황을 알리고 서방교회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로마로 항해하던 성인은 아랍 해적들에게 붙잡혀 크레테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성인은 함께 사로잡힌 동료들을 격려하여 사라센인들(십자군 시대의 아라비아인 또는 무슬림, 지중해 서쪽의 섬들과 이탈리아, 프랑스등을 침략함)의 고문을 견디면서 신앙을 지키게 하였다.
어느 성탄절 밤, 발은 나무 족쇄에 묶이고 목에도 쇠고랑을 찬 채 성인은 ‘의로우신 태양’ 그리스도가 오심을 찬송하고 있었는데, 이때 니콜라스 성인이 장엄한 모습으로 나타나 한 양피지를 건네주었다. 그곳에는 ‘자애로우신 이여, 우리를 도우러 어서 오소서. 당신은 자비로우시나니, 당신께서 뜻하신 모든 것을 이루셨나이다’(성탄절 전, 주님 선조들의 주일 시기송의 후렴구)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면서 니콜라스 성인은 황제가 죽은 뒤 요셉 성인이 자유를 얻어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임을 알려주었다.
성가 작가로서의 명성
그 후 니콜라스 성인의 말처럼 다시 제국의 수도로 돌아온 성인은 먼저 안식한 데카폴리스의 그레고리오스 성인을 이어 참된 신앙의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도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수도원을 세워 영적인 삶을 갈망하는 이들의 거처로 만들었고, 그 수도원에 성 바르톨로메오스 사도를 기리는 성당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바르톨로메오스 사도의 축일 전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던 성인에게 축일 전날 성 사도가 나타났다. 그리고 성 사도는 제단 위에 있던 복음경을 들어 요셉 성인의 가슴 위에 놓고는 축복을 해주었다. 그로부터 성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수많은 성가들을 작사,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성인은 마침내 자신보다 앞선 작곡자들의 작품들을 보완하여 완성하였고, 이로써 8 음조의 ‘빠라끌리띠끼’(Paraklitike: 주중의 만과, 조과, 심야과에서 부르는 성가)를 작곡하는 동시에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이 만든 8 음조의 부활성가를 보충하여 완성하였다. 또한 연중 매일 순환되면서 많은 성인들을 기리는 성가곡들을 완성하기 위해 까논과 스티히라(stichera)를 작사하였다.
성 포티오스 총대주교(2월 6일)의 재위기간 동안에 성인은 교회 사목과 관련하여 총대주교의 조언자가 되었고, 고위 성직자들의 고백사제 역할도 수행하였다. 어느덧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온 것을 안 성인은 총대주교에게 사직서를 내고는 자신이 세운 수도원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886년 4월 3일 일흔의 나이로 평안히 안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