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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신앙/신앙 탐구

성령을 속이는 행위는 자기 손가락 뒤에 숨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unsplash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점점 그 의미가 희미해지고 사라져 가는 말이 있다면 그 말은 “죄”라는 단어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죄”라는 말이 사라져 가는 이유는 물론 이 사회에서 범죄가 없어져 가기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죄가 이 사회에 너무나 만연되어 있어 하나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죄의 의미를 많이 희석시켜 버리고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겨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오늘날의 범죄적인 현상들을 시대적인 상황으로 돌리고 그 원인을 자기 외적인 것에서 찾으며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탓한다.

이러한 죄에 대한 인식이 죄의 의미를 둔화시키고 흐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죄란 무엇인가? 성서와 교회의 거룩한 가르침들은 우리에게 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 주고 있다.

 

1. 죄는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
죄를 범하면 사람은 자유를 잃는다. 그때부터 가장 비참한 죄의 종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몸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로마 7,23)
이 죄의 법이 사람을 지배하게 되면 그 사람은 이성을 잃는 사람이 되고,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성을 잃게 되므로 하느님과 법과는 대치되는 불의와 불법을 저지르고 방탕과 퇴폐와 부패의 죄적인 생활을 한다.

 

2. 죄는 하느님과의 결별이다.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살게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 한평생 하느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며 살게 하기 위해 창조하셨다. 그것이 아담과 하와의 낙원에서의 삶이었고 하는 일이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은 날마다 하느님의 말씀이시고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얼굴을 맞대고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죄의 종이 되어 하느님과의 교제를 잃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오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이 아니고 그들이 하느님을 만나지 않으려고 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언제라도 그들을 만나실 용기가 있으시다. 그런데도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으로 하느님과 갈라놓는 넘어갈 수 없는 벽을 쌓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한 성인이 “죄는 우리와 하느님 사이를 막는 벽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틀림이 없는 말씀이다.

 

3. 죄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모독하는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피라에게 한 사도 바울로의 꾸짖음은 큰 경종이 된다. 그들은 성령을 속이는 행위를 하였다. 성령을 속이는 죄는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벌을 받는가를 잘 나타내 주는 사례가 된 것이다.
성령을 속이는 행위는 자기 손가락 뒤에 숨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아나니아와 삽피라는 그들의 이기심과 욕심을 자선으로 가리려고 했다. 이때 사도 베드로는 “당신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사행 5,4)라고 하시며 꾸짖으셨다.
모든 죄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고 모독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성인은 “죄는 하느님께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라고 하셨다. 죄는 단순한 견해차에서 나오는 행위가 아니다.


사도 바울로께서는 죄는 “하느님의 원수”(로마 8,7)라고 하셨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고, 저주스러운 죄에서 사람들을 풀어 주기 위해 우리가 우리의 죄로 쌓은 저 높은 벽을 헐기 위해, 우리의 죄악의 노예 사슬을 끊어 버리기 위해 십자가에 오르실 필요가 있었다.


천사들이나 어느 사람도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한다. 그런데 영광의 주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바로 그분께서 오셔서 이 어려운 문제 즉 죄에서 벗어나는 문제와 포악한 죄의 힘에서 풀려나는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