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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신앙/24인 수호성인

성 이그나티오스 미팀나의 주교(10월 14일)

 

귀족 출신의 아이 

성인께서는 1492년에 미틸리니 섬(오늘날의 레스보스 섬)에서 태어나셨으며 세례명은 요한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귀족 출신인 성인께서는 어렸을 때는 아갈리아노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1453년 5월 29일 오토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 다른 수많은 피난민들과 함께 성인의 가족들도 그리스에서 가까운 미틸리니 섬으로 갔다. 성인 가족은 미틸리니 섬의 미팀나 지역에 정착하였고, 아버지 마누엘은 사제이셨기 때문에 미팀나 대주교를 보좌하는 일을 했다. 성인께서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수많은 미덕들을 지녔다. 이후 성인은 자라서 정결하고 덕을 두루 갖춘 마리아와 결혼하였으며, 당시 미팀나의 마태오 대주교는 성인에게 신품 성사를 거행하였다. 성인은 시골에서 사제로 지내면서 교인들의 영성생활을 돌보았고, 마을에 있는 성당들을 보수하거나 다시 세우기도 하였다.

 

시련이 닥침

그런데 전염병이 돌면서 요한 신부(곧, 성인)는 마리아 사모와 자녀들 거의 모두를 잃게 되었고, 단 한 명의 아들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가족적 비극을 겪으면서 성인은 천사의 삶인 수도자의 삶을 살고자 갈망하였다. 그리하여 성인은 수도자가 되어도 좋다는 영적 아버지의 축복과 아들의 허락을 받은 뒤, 1526년에 개인 소유의 토지에 있던 성모님 성당에 정착하였고, 그곳에 수도자들의 방을 마련하면서 첫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뒤 경건한 사람들이 수도원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수도생활을 원했으므로 첫 수도원에서 5마일(8km) 정도 떨어진 리몬이라는 지역에 둘째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성모님 수도원에서는 수녀들이, 리몬 수도원에서는 남자 수도자들이 생활하였다. 또한 학교와 고아원을 설립하여 아이들이 교육을 받으며 안정되게 지낼 수 있도록 했고, 성서와 교부들의 책들을 필사(筆寫)하는 학교와 자수(刺繡: 수놓는 작업)를 배우는 학교, 비잔틴 음악학교 등도 세우셨다.

 

미팀나의 주교

후에 미팀나의 대주교가 돌아가지자 총대주교청의 주교회의에서는 이그나티오스 수도 사제를 새로운 대주교로 선출하였다. 성인께서는 자신의 아들인 메토디오스 수도자를 두 개의 수도원을 책임지는 수도원장으로 임명하여 그 직을 수행케 하는 한편 자신은 대주교로서 맡겨진 양 떼들을 돌보셨다. 그리고 25년 뒤 대주교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남은 생을 수도원에서 보내며 기도와 연구 그리고 수도자들의 영적인 지도에 힘쓰셨다. 자신에게 조언을 부탁하는 사람들에게는 힘과 위로를 아끼지 않으시는 한편으로 거룩한 성서와 교부들의 책을 필사하는 일을 부지런히 하여 몇 책들은 지금도 남아 있다. 성인께서는 1566년 10월 14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안식하셨으며 당신의 뜻대로 성모님 수도원 안에 묻히셨다. 1584년 이장(移葬) 하기 위해 성인의 무덤을 열었을 때 말할 수 없이 향기로운 향내가 나와 성당 안을 가득 채웠으며 성당 밖에 있던 사람들도 그 향내를 맡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성인의 성해(聖骸)에서는 향내가 나오고 있으며, 믿음과 경건한 마음으로 성해에 다가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에게는 계속해서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