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그레고리오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1월 25일)
인내와 기도로 얻은 아들
성인은 330년 아버지 그레고리오스 사제(1월 1일)와 어머니 논나 성인(8월 5일)의 세 자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카파도키아의 작은 도시 나지안주스의 이름있는 가문이었으나 오랫동안 자식이 없던 성인의 집안에 하느님께서는 한꺼번에 세 자녀를 주셨다. 특별히 어머니 논나 성인은 둘째가 태어나기 전 아들의 형상(image)과 그 이름마저 하느님에게서 받았다.
그레고리 성인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사려 깊은 양육을 받으며 자라나 비록 어린 아이지만 성숙한 지혜와 학문에 대한 강한 열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적인 것을 깊이 묵상하거나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학적 천재성
성장한 뒤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카파도키아를 떠나 팔레스틴과 알렉산드리아를 찾았던 성인은 대 바실리오스 성인을 만난 뒤 마침내 아테네에 가서 철학과 수사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바실리오스 성인이 먼저 고향으로 돌아간 뒤, 성인도 358년 서른의 나이에 카파도키아로 다시 돌아와 세례를 받았다.
이제 더 이상 세속의 학문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게 된 성인은 이후 전적으로 기도와 명상, 그리고 엄격한 금욕생활에 헌신하기 시작하였다. 침묵 속에서 하느님에 대한 신비를 깊이 묵상하곤 했던 성인은 때때로 대 바실리오스 성인이 홀로 머무르며 영적인 수련을 하던 이리스(Iris) 강의 계곡으로 찾아가 함께 하곤 하였다.
이런 경험을 통해 아직 젊고 수도 생활을 오래 하지 않았음에도 두 성인은 우리 정교회에 면면히 전해 내려오는 수도 생활의 토대가 되는 ‘수도 규칙’(Monastic Rules)을 함께 쓸 수 있었다.
불가해(不可解)한 하느님의 신비를 설명하다
361년 배교자 율리아노스 황제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에 대항하여 완벽한 언어와 풍부한 상상력으로 신앙의 신비에 관해 설명한 성인은 370년 아버지와 함께 대 바실리오스 성인을 케사리아의 주교로 추대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바실리오스 성인을 정교회의 진정한 지도자로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379년 대 바실리오스 성인의 안식 이후 교회가 이단자들의 교묘한 논리로 말미암아 어지러워지려 할 때마다 성인은 ‘신학자’라는 칭호에 걸맞은 지혜와 명석한 논리로써 성삼위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설파(說破)하고 가르쳤다.
381년, 대 테오도시오스 황제가 개최한 제2차 세계 공의회(콘스탄티노플)에서 총대주교로 선출된 성인은 오래도록 질병에 시달리는 몸이었지만 사랑과 헌신으로 교회와 하느님의 양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말년에 고향으로 은퇴한 뒤 390년 평화로이 안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