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자애로우신 분
소티리오스 대주교
우리가 함께 드리는 예배에서 계속해서 우리는 인간이 창조된 시초부터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인류에 보여주시는 자비를 간구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친교하고자 하는 용기를 갖고, 우리의 요청 사항을 하느님께서 해결해주시기를 용기를 내어 간구합니다. 성찬예배 동안에 이루어지는 기도에서 사제는 세 번째 안티폰 기도에서 지금 주의 종들의 간곡한 애원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드리면서 "주는 선하시고 자애로우신 하느님이시니’ 라고 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모든 예식에서 연도라고 부르는 간구기도를 하고 나서, 사제는 "주는 선하시고 자애로우신 하느님이시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와 항상 또 영원히 영광을 바치나이다. " 라고 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하느님께서 무한한 자비를 인류에 보여주셨다는 것은 대 바실리오스 성인께서 쓰신 성찬예배의 봉헌기도문 안에 집약되어 나와있습니다. 즉 이 특별한 봉헌기도문에서 대 바실리오스 성인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하신 것과, 사람을 천국에서 지내게 하여서 사람이 천국에 있는 것들을 즐기도록 하신 것을 언급하면서, 그분이 보여주신 무한한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똑같이 멀리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크나큰 자비하심을 통해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미래에 있을 구원을 알리도록 예언자들을 보내셨고, 인간에게 “수호천사”를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한편 적당한 시간이 왔을 때,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리고 성체성혈로 인간의 생명에 생기를 주시기 위해 그분의 유일한 아들을 보내시고 희생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신 사랑이 표현된 경우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은 인류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의 모습이었을 뿐만 아니라 각 개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복음경에서 언급하는 베짜다 연못에 있던 중풍병자의 치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셔서 시각장애자, 절름발이, 중풍병자 등 많은 환자들이 있는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이 모든 병자들은 천사가 연못의 물을 휘저은 다음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나았기 때문에, 이러한 기적적인 치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한5,1-4 참조) 모든 환자들 중에 예수께서는 38년 동안이나 병으로 앓고 있던 중풍병자를 구별해내셨습니다. 병으로 고생하던 그 사람에게는 병이 낫도록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병자는 그때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추신 분 곁에 있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혼자이고 외롭다고 느낄 때, 우리 역시 위의 사건을 잊지 맙시다.
시편에서는 “내 부모가 나를 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 (시편26[27],10)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그 중풍병자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돕기 위해 다가가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중풍병자가 생각했던 특별한 기적적인 방법이 아닌 다른 특별하고 기적적인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실 때조차 사람에게 행하시는 방법은 우리에게 인상적입니다. 당신 마음대로 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고 그것을 존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중풍병자가 치료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 연못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물론 그것을 알고 계셨지만 곧 치료하시지 않았고, 병자가 동의해서 치료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행하시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 (요한5,6)라고 물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낫고 싶다고 말한 후에 주님께서는 그의 병을 치료하셨을 뿐만 아니라 누워있던 요도 걷어 들면서 일어나 걸을 힘도 그에게 주셨습니다. (7-9절 참조)
이분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하느님이십니다. 최고로 자애로우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돕는 은인들 중에서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가지신 자애의 수준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실 힘도 있으시고,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곳에서도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그리고 영원히 살게 되는 다른 세상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유일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으로서 우리를 도우시고 끊임없이 계속 은혜를 베푸십니다. 시편은 “주여, 당신의 자비는 제 삶 전체에서 저를 따라다닐 것입니다.” (시편22[23],6 참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결코 잊지 맙시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 우리가 동의하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는 전지하시어 모든 것을 다 아시는데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모르실까요? 기도로 내가 그분에게 간구할 필요가 있을까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답을 주십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협력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필요로 하는 것을 청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구하라, 받을 것이다.” (마태오 7:7)라고 권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말씀드릴 때 우리의 죄에 대하여 근엄하고, 어렵고, 완고하고 벌을 주는 어떤 하느님이 우리 앞에 있다는 느낌을 갖지는 맙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꿇어 엎드리게 해서 자비와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는 그런 엄한 아버지 같은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중풍병자가 불구가 된 원인이 그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치료하실 의향이 있으셨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그분의 정의보다 더 크십니다. 만과 때 드리는 기도문 중에는 "위엄하시고 인자하신 심판관 주님께 (중간 생략) 다만 주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는 것이 옵나니"라는 기도문구가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큰 자비를 베푸시는 분으로서 이러한 것이 우리 주님이신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기회를 찾으시므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을 가지고 간청이 있을 때마다 하느님께 달려오고, 기쁨과 만족감을 가지고 항상 자비하신 주님과 소통하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