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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영성/말씀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생활속 영적 단련 - 1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 영적 단련 - 1

소티리오스 대주교


 

교회는 성 요한에게, 가장 정의로운 선구자이며 세례자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특별한 영광을 부여합니다(성스러운 테오토코스 성모 마리아 다음으로). 정말로, 세례자 요한의 성화를 보면, 주님 성화 옆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인을 특별한 방법으로 영예롭게 해 주시며, 인간으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언을 해 주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오 11,11)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설교하게 하고, 회개한 사람들은 요르단 강에서 세례 받도록 하는 임무를 주셨습니다. 그곳, 요르단의 사막에서, 요한은 엄격한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마르코1,6) 그의 엄숙한 생활방식은 우리를 놀라게 했으며, 이로 인해서 요한은 “지상에 있는 천사이자, 천상에 있는 인간!”으로 불렸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의 금욕주의와 그 후 수세기에 걸쳐(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이 실천한 금욕적인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왜 그렇게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가? 왜 스스로를 엄격한 생활에 따라 살도록 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우리 모두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먼저 태초로 돌아가서, 최초에 창조된 아담과 하와를 봅시다. 창조주께서는 그들을 “하느님의 모습대로”(창세기 1:27) 창조하시면서, 하느님과 연관되어 살아가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리고 은총으로 “하느님 모습을 닮게”(창세기 1,26) 되거나 또는 그렇게 되지 않게 되거나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자유를 올바르게 누렸다면, 그들은 영생하는 생명을 얻고, 선에 확고히 머무름으로써, 천국의 축복을 누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아담과 하와는 악마에 속임수에 넘어가, 악마의 거짓말을 믿기로 선택을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신이 되고 싶어 했고, 너무나 쉽게 자기들에게 금지된 과일을 먹고자 하는 욕망을 보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의 (생각, 의지 그리고 열망) 세 가지 영적 에너지는 모두 하느님께 대항하였으며, 그로 인해 인류 전체에 치명적인 죄의 결과가 미쳤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고통이 있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세례를 받음으로 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원죄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또한 처음에 창조되었던 인간이 가지고 있던 건강한 영혼적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협력(“시너지”)해야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 주님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가진 영적인 질병을 원인에서부터 치유하셨으나, 결과적으로는 악으로 향하고 악에 대해 약한 모습을 보이는 죄의 성향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힘을 다시 회복하고 영적 건강을 충분히 회복하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육체에도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암에 걸렸다면, 수술과 치료로써 악성 종양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라서, 환자는 계속하여 약으로 치료받아야 하며, 올바른 식단과 함께 육체 운동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오직 이러한 노력이 있을 때에만 건강은 안정되고 완전히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단련을 하는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영적인 안녕이 이렇게 “안정”을 찾고, 또 영혼의 병(죄)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충분히 힘을 얻게 될 때, 영혼은 마지막 목적지인 하늘에 있는 낙원(처음에 창조된 인간들이 잃어버린)을 향해 꾸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이러한 유익한 노력을 하도록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격려해 주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루가 13,24) 성 사도 바울로는 그의 제자인 디모테오에게(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믿음의 싸움을 잘 싸워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오.”(1디모테오 6,12)라고 권고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또한, 이 싸움에서 우리에게 힘을 주기 위해, 말합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디모테오 4,7) 우리 모두는 성 사도 바울로가 일생 동안 얼마나 분투하였는지 알고 있으며, 그의 뒤를 따른 수많은 영적 투쟁가들의 분투 역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명확히 밝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결과를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모든 운동선수들이 올림픽에 나가지는 못하는 것이며, 나가더라도, 모두가 금메달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각각, 자신의 능력과, 코치의 능력과 훈련의 일관성에 따라 다릅니다. 영적 투쟁도 이와 같습니다. 모두가 성 안토니오스, 또는 기둥 위에서 수십 년간 살았던 성 알리피오스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위 위에서 천일 동안 기도했던 사로브의 성 세라핌과 같은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이 모든 성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금욕자들과 운동선수들 간에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영적 투쟁을 이어갔던 모든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고, 보상을 받았습니다.(올림픽에서 경쟁하는 운동선수들은 이와 같은 보상은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은총은 성 바울로 사도가 기록한 대로(1고린토 15,41 참조), 별의 영광이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우리 모두가 성인들의 금욕적 정신을, 가능한 한 최대로, 삶의 상황과 영적인 힘에 맞춰서, 포용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러한 일을 해낼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떤 영적 힘을 가지고 이러한 일을 해낼 수 있는가? 

시간이 부족하니, 다음 강론에서 답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