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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영성/말씀과 함께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마태오 5:11-12)

소티리오스 대주교


오늘은 구복단에서 마지막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구복단의 아홉 번째 부분이자 마지막 부분은, 이전 구복단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마지막 구복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동정녀 마리아 테오토코스와 그녀의 보호자 요셉이 아기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왔을 때, 연로한 시메온 의인은 이 아이가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루가 2,34)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불신자들의 반대를 불러일으키실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바로 이 진리를 주님께서 구복단의 마지막 부분을 통해 확증하고 계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때문에” 사탄과 사탄을 따르는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치 않은 이들의 적대적인 행동에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자기 일을 계속해서 열심히 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의 승리와 세상의 구원을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오늘날 젊은이들 가운데, 현시대의 오락 방식과 행동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속적인 젊은이들의 놀림이나 사회적 비난을 받는 이들은 축복을 받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등을 겪는 어떤 두 존재가, 서로에 대해 모욕하고 비방하며 갈등하는 것은, 가장 더럽고 비겁한 모습입니다. 그러하니, 하느님이자 인간이시며, 인간을 사랑하시는 자애로우신 하느님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되는 모욕과 비방은 얼마나 저속하고 비열해지는지 모릅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에 대한 박해와 괴롭힘은 각 나라와 각 시대의 조건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았던 거룩한 사도들의 삶은 우리에게 모범이 됩니다. 사도들은 박해받을 때,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어느 날, 유대인 의회의 의원들이 사도들을 붙잡아 매질한 뒤에, 예수에 대해 전도하지 말라고 명령하고는 그들을 해산시켰습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학대당하고 모욕당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의회를 떠났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과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메시아가 왔고, 그분은 ‘예수’라 부른다.”라는 기쁜 소식을 쉬지 않고 선포했습니다(사도행전 5,40-42 참조). 사도 바울로도 이와 같은 정신으로 박해에 대처했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마케도니아의 필립비 지역에 처음으로 갔을 때, 모든 이들은 그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관리들은 바울로와 동료들을 붙잡아 그들의 옷을 찢고는, 바울로와 실라를 몽둥이로 때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에게 심한 매질을 한 후에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바울로와 실라는 밤새 하느님께 기도하며 찬송을 드렸습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이와 같은 고문과 박해를 받는 것이었기에 만족감과 기쁨을 느꼈습니다. 거룩한 바울로 사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골로사이 1,24 참조) 바울로 사도는 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로 사도는 나중에 바로 이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서 ‘기쁨’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꼭 필요한 요소로 삼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교 진리를 이론적으로만 배웠을 뿐,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처음에 그들을 사로잡았기에, 그들은 축복받은 자들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복단에 언급된 덕들을 쌓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 그런 수고를 하지 않은 채, 그저 축복만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친교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전능하심과, 그분 교회의 거룩한 성사들의 은총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어떤 한 사제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설교를 전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두 가지 마음을 품은 채, 어느 쪽으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한 발로는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고 있지만, 다른 한 발로는 자신의 이기심에, 또 죄악된 세상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비난하고 조롱할까 두려워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까 두려워합니다. 또,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는 고백자들의 영광을 본받고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불리하고 위험한 처지에 놓이면 신앙을 숨기기까지 합니다. 가령,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시대에 뒤처진다고 남들이 비난할까 봐 두려워서 신앙을 숨기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굳은 결심을 갖지 못한 결과, 그들은 세상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아니게 됩니다.” 

 

우리 신앙을 용감하게 지키는 투사들과 고백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큰 보상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여러분을 시험하려는 것이니 무슨 큰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 오히려 기뻐하십시오.”(베드로 전 4,12-13) 

 

주님께서는 구복단에서 언급하신 아홉 가지 미덕에 대해 모두 보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때문에” 모욕과 박해와 비난을 받는 이들에 대해 약속하신 보상은 다른 어떤 보상보다도 더 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구복단의 미덕을 쌓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또 “나(그리스도) 때문에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부당하게 받는 자들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도다.”라고 거듭해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찬예배에서든 다른 예배에서든 구복단을 들을 때마다, 아름다운 성가를 듣고 부르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동시에 그 가사 속에 담긴 놀라운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또 주님께서 구복단에서 언급하신 미덕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의무를 떠올려보고, 그것을 삶 속에서 적용하고 실천하여,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보상을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