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끼릴로스 예루살렘 대주교 (3월 18일)
바른 가르침
성인은 315년경 예루살렘의 한 경건한 정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막시모스 대주교(서방교회에서는 5월 5일을 축일로 지낸다)에 의해 사제로 서품된 그는 예비신자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겸손하고 온유한 성품으로서 제1차 세계공의회(325년, 니케아) 이후 교회를 찢어지게 하는 끝없는 교리 논쟁보다는 신자들의 신앙적 인격형성에 더 관심이 있었던 성인은 정교신앙을 전적으로 믿으면서도 예민한 교리적, 신학적 표현(이를테면 ‘오모우시오스’[homoousios: 본질이 같으신])은 삼가고 있었다.
그러나 성인은 347년 막시모스 대주교가 안식하자 그 계승자로 선출되어 세례예비자에게 ‘신앙의 신조’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쓴 교리교육서(Catecheses)를 통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바른 가르침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아리오스주의
수년이 지난 후 아리오스주의자인 케사리아의 대주교 아카키오스는 터무니없는 일을 빌미 삼아 성인을 면직(免職)시킨 다음 강제로 예루살렘에서 쫓아내 버렸다. 성인은 부당함을 호소하는 한편, 킬리기아 지역 타르소(Tarsus)의 실바노스 주교가 베푼 형제적 사랑으로 그곳으로 가 바른 가르침을 계속해서 선포할 수 있었다.
359년 셀류기아(Seleucia)에서 열린 지역공의회에서 성인의 주장이 올바르다는 것이 받아들여졌고, 아카키오스는 면직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배교자 율리아노스(로마제국의 황제. 331/332-363년 생존. 361-363 집권)가 권력을 잡게 되자 성인은 다시 자신의 교구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교회를 위한 지난(至難)한 노력
그 뒤 율리아노스를 이은 황제 발렌스(동로마제국 황제 364-378 집권)를 설득한 아리오스 주의자들의 음모에 의해 다시 주교직에서 쫓겨난 성인은 먼 곳으로 12년 동안 망명을 떠났다가 발렌스가 죽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리오스 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무리들로 말미암아, 379년 무렵 니사의 주교 그레고리 성인이 행한 중재 노력에도 평화를 찾지 못하던 교회는 테오도시오스 황제가 소집한 381년의 제2차 세계 공의회(콘스탄티노플)에서 정교(Orthodoxy)를 위해 투쟁한 성인의 노력이 인정됨에 따라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되었다.
35년의 주교직 기간 동안 16년을 망명생활로 보낸 성인은 386년에 평화로이 안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