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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영성/말씀과 함께

기쁨에 대하여

 

기쁨에 대하여

암브로시오스 대주교


우리 주님의 ‘대사제의 기도’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이 납니다. “아직 세상에 있으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3)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때 바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기쁨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이란 것이 ‘기쁨의 소식’을 의미하며, 복음서 안에는 ‘기쁨’이라는 단어가 수십 번도 넘게 언급되고 있지 않나요!

 

물론, 복음서에서 말하는 ‘기쁨’은 세상에서 쓰는 이 단어의 의미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인간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느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의 이 기쁨은 성령의 열매인데, 이 기쁨이 세상에서 의미하는 기쁨과 공존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기쁨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성격 없이 우리의 자극만 충족시키는 감각적 기쁨이 아닌 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적 기쁨에 영적인 성격이 없다면, 그것은 현상적인 기쁨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진정한 기쁨을 해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놀이, 노래, 자연의 아름다움, 사랑의 황홀경, 지식, 창조적 활동, 예술, 아름다움, 학문, 사람들과의 교제, 우정, 축복받은 결혼 생활, 자녀를 낳아 양육하는 것 등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이 모든 기쁨은 배제되거나 금지되거나 경시되지 않은 채 하느님의 뜻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다 우리를 위하는 것”(1고린토 3,21 참조)이라고 사도 바울로가 강조했듯이 말입니다.

 

다음과 같은 의문이나 이견이 있을 수 있는데, 그에 대한 답변도 같이 제시해 보겠습니다.

1) 교회에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기 사항이 많은데, 우리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답: 농부가 작은 나무 주변에 지지대를 세울 때, 이는 그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여린 나무가 꺾이거나 쓰러지지 않고 잘 버텨서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지탱해 주기 위함입니다. 교회가 신자들에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답: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슬퍼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용서에 대해서는 기뻐합니다. 이러한 ‘슬픔 어린 기쁨’은 우울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3) 오락이나 놀이가 허용됩니까?

답: 물론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어떤 놀이를 하는지도 중요합니다. 돼지들이 더러운 진흙탕에서 뒹굴대면서 온몸을 더럽히고 주변도 엉망으로 만드는 놀이가 있는가 하면, 갈매기들이 찬란한 바다의 하얀 거품에 빠져들면서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는 놀이도 있습니다. 우리가 한번 잘 생각해 봐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