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탓인가
사람들끼리 어떤 갈등이나 분규가 생겼을 때 사람들은 보통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린다. 그리고 제삼자적인 입장에서도 자기와 이해관계나 친분이 있는 쪽을 두둔하며 모든 책임을 그 상대방에게 돌린다.
이런 방법이 어떤 사건을 처리하는 방법이라고 그들은 생각하며 또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받고 자기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우리 생활 속에서 직접 겪으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교부의 가르침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교부들께서는 모든 사태의 원인을 자기 속에서 찾고 그 책임을 자기가 져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스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사례로 들며 그 사건의 원인과 책임은 그들에게 있었음을 설명해 주신다.
출애굽기에서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내리신 재앙은 그 책임이 파라오에게 있었다. 하느님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신 원인은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느님의 정의에 어긋나는 악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느님께서 단죄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교만에 빠진 이집트인들 자신이 저지른 자기 죄의 대가였다. 하느님께서는 계속 모세를 시켜 파라오가 행하고 있는 죄적인 일들을 회개하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파라오는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내려진 재앙들이었다.
이집트 사람들에게 어둠을 주신 사건도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시켜 이집트 땅을 온통 어둠에 휩싸이게 하셨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팔을 뻗치니 이집트 땅이 온통 짙은 어둠에 싸여 사흘 동안 암흑세계가 되었다. 사흘 동안 사람들은 서로 알아보지도 못했고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했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고장만은 환하였다.”(출애굽기 10,22~23)
한쪽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이고 한쪽은 환한 햇살이 내리쏟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어떤 외적인 조건이 그러했기 때문에 된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태산으로 햇빛을 가리셨거나 장벽을 쌓아 햇살을 막으신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공평하신 분이시다. 누구에게도 공평하게 햇빛을 주신다.
그런데도 이집트 사람들이 어둠에 휩싸이게 된 원인은 그들이 그곳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사의 선택권을 그렇게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원인은 그들 안에 있는 것이다. 그들의 악의가 검은 구름같이 그들의 광명을 막아버린 것이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어떠했는가? 그들에게는 환하게 비추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선택한 것이다.
이집트 사람들에게 내려진 다른 모든 재앙도 이렇게 해석돼야 한다. 즉 그들이 그렇게 선택해서 일어난 일들이다. 하느님의 공정한 정의는 그들에게 행한 행위를 심판하셨을 뿐이다. 그들이 제 마음대로 그렇게 선택했기 때문에 당한 재앙이다.
의사가 과식으로 속이 꽉 막힌 환자에게 구토제를 주었다고 해서 토할 때의 고통이 의사의 책임일 수는 없다. 고통의 원인은 당사자에게 있다.
이 시대의 재앙도 그렇다. 또 앞으로도 많은 재앙이 예고된다. 이 시대가 계속 하느님을 부인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다면 재앙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의 자유의사가 남용되지 않는, 하느님의 정의를 이탈하지 않는 선택이 있어야 재앙을 모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선택의 기본은 자기가 책임지는 자세에서 나와야 한다. 모든 불행과 재앙의 원인은 일차적으로 자기 속에서 찾아내도록 해야 하며, 우리의 불화와 갈등과 이 시대의 위기도 우리가 그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자세가 적게는 자기 구원이 되고 크게는 사회적인 구원이 되고 종말에 가서는 천국과 지옥의 선택 기반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