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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신앙/신앙 탐구

반쪽 신자와 거짓 신자

그리스도를 유일한 의사요, 구세주로 모시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반쪽 신자와 거짓 신자


그리스도교는 그 출발부터 박해와 고통을 겪으며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그리스도교는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고통은 박해자들로부터 받는 고통이 아니다. 도리어 같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발생하는 고통이다. 본래 내부의 적이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내부의 적은 같은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 해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에 해가 되는 이런 사람들은 무신론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믿음을 반대한다고 선언은 하지 않지만 믿음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아주 끊은 것도 아니어서 완전히 남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한 발은 교회 안에 들여놓고 한 발은 세상에 그냥 두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두 갈래로 갈라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는 엉거주춤한 믿음으로 반은 세속에 속하고 반은 하느님께 속해 있다.

 

이러한 사람들도 믿는 사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고 지켜야 할 사항들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자세와 지켜야 할 사항을 그대로 이행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인 같은 분들과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나 성서 말씀대로 살며 교회가 가르치는 신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지 자기들은 그럴 자격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성서의 중요한 부분만 지키며 적당히 처신하면 되고 경건하고 엄격한 생활은 신앙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은 왜곡된 사고방식은 현실 세계와 하느님의 가족 사회라는 두 다른 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그들 마음대로 하나의 거짓 그리스도교 생활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생활은 엄격하여 많은 제한과 구속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마음대로 못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신앙생활은 세속 생활을 억제하고 믿음에 충실해야 하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죄적인 생활은 금지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자신의 생활을 구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신앙생활의 원칙들을 아주 유연하게 조절하여 일반 윤리에 준하는 생활을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좋은 사람이 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관용을 베풀고 선하게 살고 하는 등의 일반적인 윤리관으로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영적 체계를 내적으로 약화하고 있다.

 

그들의 이와 같은 윤리관은 일종의 강박관념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믿으려면 고통과 슬픔도 따르고 검약해야 하고 베풀어야 하는 등 절제와 자기희생이 따라야 하기 때문에 그 길을 피하고 언제나 편안하고 쉬운 삶을 원하는 데서 그러한 그릇된 생활관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영적으로 병든 상태이다. 이러한 영적 병자들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힘들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유일한 의사요, 구세주로 모시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스도의 평화와 정의, 사랑, 그리고 거기에서 찾을 수 있는 희망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제한되어 있다. 더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성과 순결 그리고 탐욕을 십자가에 매달고, 낡은 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되는 데에 애해 언급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교회를 중요시하는 듯한 말은 쉽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책임을 다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는 것도 드문드문 나오고 고백성사와 영성체도 계속 미루기만 한다. 그리하여 영적 빈혈증에 걸려 나약해지고 영적 무장이 해제되어 악에 대항해 싸울 힘을 잃게 된다.

이처럼 미지근한 믿음은 결과적으로 우리를 신앙적인 오류와 자기기만에 빠지게 하여 자기 파멸을 초래케 하는 대단히 위험한 신앙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