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멜레띠오스 안티오키아의 대주교 (2월 12일)
아리우스 이단
성인은 니케아 공의회(325년)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4세기를 통틀어 아리우스 이단 추종자들에 의해 극심하게 분열된 교회의 일치를 위해 많은 수고를 하였다. 성인은 소(小) 아르메니아의 멜리티니(Melitene)에 있는 귀족 집안 출신으로서 학식이 높고 덕망이 있는 사제로 널리 존경받았으며, 하느님의 명령을 부지런히 지킴으로써 성령을 담은 그릇이 되어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평온함과 기쁨을 제공해 주었다. 침착하고 균형 잡힌 방식으로 참된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성인은 셀 수없이 많은 분파로 흩어진 전체 그리스도의 양 떼들을 하나로 모았다. 성인의 온유한 외모는 격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나타내 주었으며, 잔잔한 웃음은 성인이 참으로 진리의 대변자임을 증명해 주었다.
명쾌한 진술
성인은 358년 세바스티(Sebaste)의 주교로 선출되었으나 시민들이 당파적이며 제어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자신의 교구를 떠나 베뢰아(Beroea: 시리아 알레포[Aleppo]의 옛날 이름)로 갔다. 360년 에프스타티오스(2월 21일) 성인의 유배 이후 피폐해진 상태였던 안티오키아의 대주교로 다시 선출되었다. 도시의 시민들은 물론이고 유대인들과 이교도들조차 성인을 반겼으며, 콘스탄티오스(Constantius) 황제가 몸소 참석한 착좌식이 열렸다. 성인은 이 자리에서 성삼위와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바른 가르침을 명쾌하게 진술했으며, 이로써 아리우스주의자들은 격노하여 성인을 유배 보내도록 황제를 부추겼다. 이후 많은 사람이 멀리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추방된 성인을 찾아와 가르침을 들었으며, 안티오키아에서는 이단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였다.
추방과 귀환
이후 배교자 율리아노스(361-363 집권)와 조비아노스(363-364 집권), 발렌스(364-378 집권)의 통치기를 거치면서 성인은 귀환과 추방을 반복하는 심난(甚難)한 삶을 이어갔으며, 마침내 그라티안(375-383 집권)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대 바실리오스 성인을 여러 차례 만나 영적 친교를 나누었으며, 요한 크리소스톰 성인에게 세례를 베푼 뒤 보제로 서품하기도 하였다. 또한 테오도시오스 황제(379-395 집권)의 임명을 받아 제2차 세계 공의회(콘스탄티노플, 381)를 주재하는 한편, 신학자 그레고리 성인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직을 맡는 데 관여하기도 했으며 공의회 기간에 평안히 안식하셨다. 황제와 공의회의 교부들이 참석한 장례식에서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성인은 감동적인 조사(弔詞)로서 성인을 애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