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타라시오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2월 25일)
신자에서 총대주교로
성인은 콘스탄티노플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약자와 선량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저명한 법관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인은 한편으로는 어머니로부터 지고(至高)한 경건성을 배웠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뒤 780년에 집정관(執政官)이 된 성인은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784년 성상파괴 주의자들(iconoclast)을 지원했던 총대주교가 올바른 정교회 신앙으로 돌아온 뒤 사임하면서 성인을 자신의 승계자로 추천하자, 자신은 그저 평범한 신도일 뿐이라며 한사코 마다하던 성인은 끝내 순종하는 자세로 이 제의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곧 이단(異端)의 성행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성인은 784년 성탄절에 총대주교가 되었다.
검소한 사랑의 목자
정교회의 수장(首長)이 되자마자 성인은 거룩한 덕성에 더하여 금식과 밤을 지새우는 철야기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 그리고 복음적인 자선행위에 몰두하였다. 성인은 주님의 본을 따라 모든 이의 종이 되려고 하였다. 소박하고 검소한 옷차림을 좋아했던 성인의 생활방식은 사치스러운 옷을 즐겨 입던 당시 성직자들과 대조를 이루었다. 자선사업을 어찌나 널리 펼쳤던지 사람들은 성인을 ‘새로운 요셉’(기근 때에 백성들에게 식량을 공급한 구약성서의 인물)이라고 불렀다. 성인은 호스피스(hospice,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 시설을 짓고,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 소박한 음식이나마 함께 나누었다.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이 많아지자 그는 보스포로스 해협 서안(西岸)에 그들을 위한 수도원을 세웠다. 성인은 787년 9월 24일에 니케아에서 첫 회의를 시작함으로써 제7차 세계공의회를 주재하였고, 이로써 이단들을 분쇄함과 동시에 성화에 대한 경배(veneration)가 올바른 신앙임을 확증하였다.
교회의 평화를 위한 헌신
790년 오랫동안 어머니 이리니(Irene)의 섭정을 받던 콘스탄틴 6세 황제가 성숙한 나이가 되어 교회법을 어기려 하자 성인은 이에 저항하였고, 그로써 가택연금의 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의 심판이 황제에게 임하여 그 이듬해에 황제는 권좌에서 물러나고 만다. 다시 자유를 얻은 성인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교회의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교인들로 하여금 신앙의 참된 열매를 맺도록 독려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병에 시달리면서도 목자지팡이에 기댄 채 매일 예배를 드리던 성인은 806년 2월 평화로이 안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