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사도의 사랑
요한복음(21,6)에서 주님은 사도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때 베드로는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하고 대답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하고 이르셨다.
이 말씀은 만약 네 말대로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뜻하시는 것, 또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양 떼를 돌봐 주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이다.
여기에서 어떤 이들은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말씀이 오직 베드로 사도에게만 국한된 말씀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직접적으로 이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이 말씀은 적용된다. 만약 지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도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고 그리고 우리도 베드로처럼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한다고 가정하자. 그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시겠는가? 만약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사랑은 추상적이지도 않고 말로만 표현되는 것도 아니고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를 보라! 그분께서 왜 세상에 오셨는가? 이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희생으로 보이셨다. 우리는 무엇으로 그분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겠는가? 사랑, 사랑을 통해서이다.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옮겨진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현대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그들의 갈증을 꼭 만족시켜 줄 것이 무엇인가? 빵도 아니다. 물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음식이나 먹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우리를 내적 부패나 자기중심으로 끌고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수를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뜻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영혼을 위한 양식)을 주어야 한다.
우리가 만약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을 통해 명백해질 것이다.
여기 또 다른 말씀이 있다. “네가 늙으면 어떤 이는 너의 팔을 벌리고 그리고 다른 이는 너를 묶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너를 데려갈 것이다.” 참으로 그리 할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시간과 힘이 있어 우리들의 사랑을 보여 줄 수가 있다. 하지만 곧 우리도 늙을 것이다. 질병이나 죽음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이다. 그때 우리는 복음의 빛을 비추고 싶겠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듯이 우리들에게도 그 질문을 던지려고 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사랑을 표현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적어도 우리들의 기도를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의심할 것도 없이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그리스도 자신께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에 대한 보살핌이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그리스도께서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을 모를 때 그들은 길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면서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알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베드로에 대한 복음이 부활절 복음으로 우리가 읽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이 복음으로 우리는 사람들의 영혼을 부활로 인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보다 많은 사랑을 가질 수 있도록 일깨워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우리가 “죽음에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